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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과 상실(경계선 인격장애)
위니캇반 8.(rroye@hanmail.net) http://www.freudphil.com
2011년 12월 25일 22:21 6731
이별과 상실(경계선 인격장애)

1. 수업을 마치고... -의존님.

언제나 수업은 어렵고 힘들지만 '경계선' 수업을 들을 땐 그 힘듦이 극에 달했던 것 같다. 선생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아 필기를 할 수 없는 순간들도 있었고, 들려오는 말씀과 나 사이에 밀어내는 자력이 너무도 컸었다. '경계선 성격장애'의 스무가지 특징 중 어느 것 하나 내 것 아닌 것이 없었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담과 수업 그리고 내가 꾸고 있는 꿈들은 내가 '경계선'과 '유아성 인격장애' 라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처음으로 '나'라는 사람을 객관화 해보는 의미가 있는 시간들이기도 했지만 가슴아파해야 했던 시간들이기도 했다. 내 고통 그리고 아픔의 병명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일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내가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일을 제대로 안하시고, 어떤 날은 일을 해서 번 돈도 집에 가져오지 않으셨다고 한다. 당연히 부모님의 싸움은 잦았으리라. 힘없고 약한엄마에게 계속해서 좋지 않은 환경은 주어졌고, 그런 엄마의 나쁜 감정들은(분노, 짜증, 화, 스트레스) 아기였던 나에게 그대로 쏟아졌을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때 외가댁을 방문하면 그때마다 들어야하는 얘기들이 있었다. “징그럽게 울어 댔어. 하여튼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했으니까... 애미 밥도 못 먹게 하고 잠시도 안 떨어져서 일도 못하게 하고 너 때문에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게...” 얼마 전 돌아가신 외할머니께 귀가 따갑도록 들은 말이다. 미움이 잔뜩 섞인 감정과 함께 말이다.

이 얘기는 큰 이모가 우리 집에 오실 때마다 되풀이해서 계속 듣는 래파토리이기도 했다. 미움이 잔뜩 섞인 무드 앞에서 나는 그 얘기를 들을 때마다 엄마를 괴롭힌 아이, 힘들게 한아이로 ‘내가 나쁜 아이구나’라고 느꼈던 것 같다.

어린 시절은 동생들과 참 많이 싸웠다. 그때마다 나는 엄마에게 “내가 너희들 때문에 미칠 것 같다!” 는 말과 함께 욕설과 매질을 당하든지 집 밖으로 쫒겨 나든지 했다. 우리들의 얘기는 들어보지도 않고서 말이다. 나는 너무나 억울했고 분하고 슬펐다. 엄마 아빠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아도 그랬다. 아버지는 더 무서웠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매를 맞는 날에 불안과 공포는 말로 표현하기가 너무나 어렵고 지금도 그 순간을 떠올리면 가슴이 막힌다.

엄마는 집안일과 아버지의 일을 도와 드려야 했기 때문에 일에 치여 늘 바쁘셨다. 두 분이서 싸우는 모습도 많이 보고 자랐다. 나에겐 좋은 기억이란 없다. 가족끼리 가까운 공원으로 바람을 쏘이러 다녀본 적도 없었다. 우리 셋은 늘 방치 상태였다. 나에게 집이란 곳은 편안하고 쉼이 있고 따뜻한 곳이 아니라 빨리 도망가야 할 것만 같은 곳,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나에겐 정서적으로 적절한 지원과 보살핌 편안함과 따뜻함 가르침을 주는 부모는 존재하지 않았다.

타인의 도움이 가장 많이 필요한 절대적 의존기에 엄마의 정신증적 병리 때문에 나는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가 없어서 내 발달은 거기에서 정지 되었으며 그로인해 나는 무엇이든 혼자서 스스로 할 수 없는 의존적인 사람이 되었고, 탐욕이 가득하나 책임과 의무를 회피하며 게으르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는, 세상의 좋은 것들과 사람들에 대해 가치 없다고 평가절하시키는 시기심 가득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 누구와도 접촉하지 못하고 내 주관적 환상 속에서만 사는 현실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열심히 해 보려고 해도 선생님의 설명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웠고, 뭐든 잘 기억해 내지 못하고, 한참 공부해야할 시기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잠으로 보냈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아 아침마다 전쟁을 벌여야 했던 시간들. 열등감과 수치심에 시달려 전공과목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 겨우 졸업을 하게 된 일들.

조그만 좌절과 불편한 감정들을 견뎌내지 못하는 나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었다. 그 어떤 것도 성취해내지 못한 무능력한 사람이 되었다. 무능력한 내 자신이 늘 혐오스럽고 미웠는데 내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원인이 내 발달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을 때 하염없이 울었다. 나 자신을 혐오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나를 이해하고 아무런 노력없이 그냥 그렇게 흘러 가버린 시간들에 대해서 깊이 슬퍼해야 했다.


결혼하기 전 내가 바라던 배우자 상이 있었는데 이런 저런 여러 가지 이유들을 종합해서 결론을 내면 '나를 완전히 책임져주고 돌봐줄 사람'을 바랬었다. 서로 동등한 관계에서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배우자로부터 부모의 돌봄을 받을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 역시 절대적 의존기 때 받지 못했던 것을 채우고 싶은 내 무의식적 소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운 좋게도 난 좋은 남편을 만났고, 남편에게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것을 의존하며 살았다. 내가 원하는 것, 남편에게 그 필요를 채워달라고 요구하는 모습은 “엄마 이것도 해줘, 저것도~”하며 징징거리고 매달리는 아이의 모습과 같았다. 생활비에서 나 자신을 위해서만 많은 돈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상담을 통해 발견했을 때도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우리 남편도 받고 싶고 채우고 싶은 것이 있었을텐데. 남편이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지 생각도 못해 봤다. 하지만 지금도 나는, 한없이 의존하려는 욕구가 어마어마하게 올라오는 것이 느껴진다.

또한 내 안의 시기심은 남편과 아이가 좋은 걸 누리는 꼴을 보지 못한다. 남편이 뭘 좀 같이 하자고 하면 “그걸 뭐하러 해”라는 말이 저절로 나오고, “엄마, 우리 반에서 나만 숙제를 잘 해왔다고 선생님께서 10point 주셨고 우리 모둠이 역전을 해서 1등 했어. 기분 짱 좋아”라고 했을 때 나는 “너희 반에서 숙제 해 온 학생이 너 혼자라면서 점수를 더 주셨어야지 10점이 뭐니?”라며 선생님께서 주신 10점을 가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아이의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마음도 짓밟기 일쑤다. 포켓몬 카드와 구슬을 보면서 소리 지르고 열광하는 모습을 좋은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저런게 뭐가 좋다고 저렇게 난리야~” 무시해버린다. 내 안에 결핍이 너무 커서 좋은 것을 그대로 보고 받아들이지 못 하고 평가절하해서 사람이든 물건이든 가치를 기어코 떨어뜨리고야 만다. 다른 사람한테는 말할 것도 없고 시기심 때문에 내 자식이 잘 되는 꼴을 못 본다는 사실에 내 자신이 너무나 무섭게 느껴졌다. 이런 내 모습을 발견한 날 잠든 아이의 손을 잡고 미안함에 얼마나 가슴이 아팠던지.

내 무의식은 유년기때 받지 못했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성인이 된 지금의 나에게도 계속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랍고 충격적이다. 이 어마어마한 힘을 뭐라고 표현 할 수 있을까?. 정지된 발달 때문에 삶의 많은 부분에서 갈등과 문제를 일으켜 내 삶을 제대로 살아내지 못 했는데 정말 슬프다.

요즘 나는 해 보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도전해 보고 있다. 예전에 '가치 없게 그런 걸 왜 하냐?'고 했던 것들이다. 비현실감 속에서 살고 있는 나는 세상의 모든 것에 의미가 없었고 공허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늘 뒤에서 뒷짐지고 구경이나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험해 보지 않았던 것들을 경험해 보면서 세상에 배워야 할 것들이 정말 많이 있다는 것과 사람들이 모여 이루어낸 사회적 문화적 산물들이 나름대로 가치가 있고 의미가 있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는 듯하다.





2. <이제 엄마는 없다> -성숙님.

엄마 없어 상처 입은 너, 너는 너의 길을 가라, 나는 엄마로서 내 길을 갈 것이다. 내 원하는 대로 사랑해주지 않은 엄마를 원망하는 일의 부질없음. 날 돌봐줄 엄마는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그 무력했던 시점에 멈춰 서있는 어린 소녀와 지금 중년의 나. 이 두 얼굴이 한 여자의 것인데. 그 아이가 성숙해져야 할까, 나이든 이 여자가 퇴행해버리고 말 것인가?

나는 내 안에 그 작은 소녀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았다. 그냥 세상을 돌아다니는 이 중년의 여자가 나 인줄 알고 살아왔다. 이 여자는 가짜였다. 제법 사회속의 직장인 노릇, 엄마노릇, 아내노릇에 적응하며 역할 놀이에 충실했다. 딱히 사는 재미가 있지도 않았고 힘들어 죽겠는 때가 더 많았었던 것도 같지만 이만하면 운이 좋은 셈이라고까지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 나는, 남이 볼세라, 내 안에 꽁꽁 숨어 기도 못 펴고 주눅 든 채 어린 나이에 멈춰있었다. 멀쩡하게 지내다가도 가끔씩 이 아이가 출몰하여 마치 ‘애처럼’ 화를 내거나 울거나 투정을 부리거나 맥없이 늘어져 누군가 내 상황을 다 해결해주길 기다렸다.


수업을 듣는 두 학기 내내 ‘거짓자기’라는 그 말을 남 얘기로만 들었다. 내가 내 맘대로, 내 욕구대로 살지를 못하는 기분. 뭔가 내 안에서 따로 도는 기분. 내가 내 인생을 산다는 직접성이 없는 기분. 그게 바로 내가 가짜로 사는 데서 비롯된 매우 진실된 기분이었다. 진짜 나는 너무 쪼그라들어있어서 아주 가끔씩만 나와 접촉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주 가끔씩만 내가 나를 만나고 있었다는 기막힌 현실.

올 한해 이런저런 방식으로 나를 관찰했다. 올 초, 나는 내 안의 상처받은 아이와 만난 적이 있다. 6-7세경의 사진 속의 나. 입꼬리가 쳐지고 어린애답지 않게 신중하고도 무거운 얼굴표정. 그 아이를 만나러 가면서 몸이 후들거리게 눈물이 흘렀다. 너 참 이쁜 아인데, 여의치 않은 환경속에서 많이 기가 죽었구나. 몇 마디 그 아이와 대화도 나누었고, 왜 그렇게 기운이 없냐는 질문에 대한 그 아이의 대답도 들었고, 앞으로 자주 만나자는 약속도 했다. 그 때 처음 내 안에 또 한 사람이 있음을 알았다.

7월경 꿈에 내가 전공한 영국소설가 버지니아 울프가 나왔다. 그 작가를 소개하는 세간의 사진이 있다. 아름답지만 창백한 얼굴색과 무표정의 20대 초반 시절 얼굴. 꿈에 나는 그녀 옆에 앉아 그녀가 입은 옷과 얘기하는 표정, 대화내용을 들었다. 내가 생각하는 버지니아 울프는 지적이고 마른 젊은 처녀의 모습인데 왠지 내 옆의 버지니아는 50대 중년의 여자로, 피에로 옷처럼 총천연색의 화려한 무늬가 들어간 블라우스에 몸빼 바지 비슷하게 발목에서 주름이 잡힌 풍성한 옷차림이었다. 표정도 볼에 연지를 발랐나 싶게 홍조를 띄었고 사용하는 어휘도 표현도 아주 적나라한 인간적 모습이었다. 세속적이고 이기적이고 남 흉을 보고 멋진 물건을 어디서 샀다는 둥, 아주 물질적이고 세상사에 훤한 여자였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렇게 다른 여자였다.


12월 얼마 전 꿈에는 박근혜가 나왔다. 어떤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던 중, 내가 엉겁결에 박근혜씨를 사무실 안으로 모시게 되었는데 엉뚱하게 사무실 밖으로 난 길로 빠져든다. 이 길이 아닌데 싶은데도 우리 둘은 이야기를 나누며 계속 걸었다. 광장 같은 곳을 지나 도시의 좁은 주택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처음의 그녀는 무채색 정장차림이고 화장도 표정도 몸짓도 경직되고 단조롭다. 그러다가 나와 대화를 나누며 골목길에 들어선 그녀는 화사한 진분홍 투피스를 입고 있고 발그레한 얼굴과 단발머리에 애 같은 표정으로 재잘재잘 이야기에 몰입한다. 나와 친구같이 언니같이 팔짱을 끼고 걷다가, 잡은 손을 앞뒤로 흔들기도 하면서 즐거워했고, 나 역시 사춘기 소녀처럼 깔깔대며 뭐가 재미있는지 막 웃으며 걷는다. 무슨 말 끝에, “남자랑 같이 스포츠나 하겠지....” 하면서 건조한 말투로 이야기를 하길래, 내가 듣고 있다가 답한다. “근데 보통 남자들은요, 여자를 만나면 ‘몇 살이냐?’ 묻고 다음엔 ‘무슨 일 하세요?’ 한다구요” 생활의 냄새가 없는 박근혜의 공적인 모습에는 근엄한 공주의 아우라가 있다. 그러나 실제 만난 박근혜는 철없는 아가씨, 현실감 없는 애처럼 연약하다.



반복되어 나타나는 이 두 얼굴들. 나의 ‘거짓자기’와 ‘참자기’를 자꾸 등장시키는 내 꿈의 메시지는 무엇일까? 너에게는 참고해야할 어린 소녀가 있음을 알리려는 경고 혹은 질문?—계속 이렇게 두 얼굴로 분열되어 살래? 아니면 6-7세 나이 적의 그 아이 마음을 충분히 들어주고 그 맺힌 마음을 풀어주어 떠나보낼래?

<써니> 라는 영화에서 유호정이 거리를 걷다가 고등학생시절의 자기가 벤치에 앉아 우는 모습을 만나는 환상같은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이 내 가슴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왔다. 그녀는 앉아 우는 소녀 시절의 자기 옆에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괜찮다고 달래준다. 아~ 저렇게 ‘내 안의 나’와 만날 수 있구나. 저렇게 그 시절의 나를 위로해주고 괜찮다고 다독여줄 수 있구나. 우리는 모두 그렇게 한 시절의 나와 이별하고 길고 짧은 애도의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구나. 그 상실의 아픔을 견뎌내고 어른으로서의 삶으로 걸음을 옮겨야 하는 것이구나. 나는 너무 오래 그 아이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구나. 회한에 사무쳐 그 아이와 너무 오랜 시간 넋두리를 해왔구나. 그만 그 시절의 나를 그 시점에 놓아주고 현실로 돌아와야 하는 것을, 어린 양을 오래 부렸구나...깨닫게 해줬다.

한 해 동안, 이러저러한 시점에서 자꾸 어린 시절의 나를 만났다. 몸이 휘어지게 서럽기도 했고 내 안쓰러운 모습에 부모님 욕도 참 많이 했고 눈물로, 글로, 말로 부정적인 말들과 기운을 가슴속에서 많이 토해냈다. 남아있었을 앙금들은, 수업시간의 사례에 나오는 그 안쓰러운 사람들과의 만남에서 조금씩 쓸려나가기도 했다. 점차 눈물이 잦아들었다. 점차 덜 서러워졌다.

앞으로 내 안의 아이가 어느 나이로 나타날지 궁금하다. 그 아이가 커갈수록 할 말도 더 많을 것 같고, 지금껏 억지로 해온 어른 노릇을 진짜 어른된 자세로 의연히 해내라는 조언을 들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다 귀찮다며, 애처럼 다시 깽판치고 편하게 살아버릴 거라며 맘껏 퇴행할지도 모르고.

그러나 지나친 기대는 금물. 그 아이는 어쩌면 빨리 성장하길 거부할 수도 있으니. 적어도 내안에 그런 소녀가 내내 있었음을 알았다는 것, 발견하고 사귀기 시작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아주 큰일을 해낸거다. 수업 내내 ‘엄마’가 저지른 잘못들을 들으며, 난 내 안의 ‘아이’ 마음에 점점 가까워졌다. 그렇게 난 내식대로 이 수업에서 최고의 선물을 받았다.





3. 사루비아꽃을 따며 울던 그 아이. -슬픔님.

내가 6살 때 우리 집 정원에는 사루비아 꽃이 많이 피어 있었다. 아버지는 토요일 오후면 늘 정원의 화단을 관리하며 즐거워 하셨다. 그날도 나는 화단을 정리하는 아버지 옆에서 사루비아꽃을 보며 꽃을 하나씩 따서 뒷부분의 단맛을 먹었다. 아버지는 처음에 꽃을 따지 말라고 주의를 주시다가 화가 치밀어 나를 회초리로 마구 때리셨다. 아버지의 화는 늘 그냥 훈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다 쏟아내고 어린 딸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거르지 않고 내뿜었다. 늘 그랬다. 유년기에 자전거를 타다 넘어지면 아버지는 어린 딸이 닥쳤을까봐 걱정되어 달려오시는 것이 아니고 자전거가 망가졌는지를 확인하고자 자전거로 달려 가셨다.

나의 아버지는 45살의 노모에게 태어난 막내아들이다. 어려서부터 자신의 어머니에게 따뜻한 눈빛이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다.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 사회적으로는 성공 했지만 늘 세상 사람들에게, 가족들에게 격노하였다. 그런 아버지로 우리 가족, 특히 나의 어머니는 늘 불안 속에서 사셨다. 그러나 어머니의 불안은 외할아버지 때부터 있으셨다. 외할아버지는 아버지와 같이 격노가 강한 분이며 외할머니는 잔소리로 남편과 자녀를 통제하고자하는 분이셨다. 어머니는 장녀로 늘 할아버지의 격노가 싫어 결혼도 안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자신의 아버지와 똑같은 남편을 만나 그 불안이 계속 이어졌다.

어머니는 어린 나를 붙잡고 아버지 흉을 보셨고 나는 때론 어머니를 늘 달래주는 딸이며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주는 조숙한 딸이였다. 또한 어머니는 늘 나를 자신의 줄 인형처럼 조정하고 통제하셨다. 나는 그런 풍경 속에서 자란 그림이다. 현재의 내 모습은 태내기, 영아기, 유아기, 학령기등을 걸쳐 지금은 중년에 이르렀지만 내 부모, 특히 나의 어머니의 그림자는 늘 내 옆에 깊게 드리워져 있다. 나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불안을 잠재워 주는 딸로, 때론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조정하고 통제 당하는 딸로, 자신을 대신해 세상에 소통하고 성취할 수 있는 딸로... 그렇게 내 옆에 계신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 부터 진정한 내 마음을 읽어주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을 먼저 읽었고 자신의 처지를 먼저 읽었다. 참 씁쓸하다.

이런 나의 그림을 예전에는 전혀 인식하지 못했고 알고 있다고 해도 그다지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강하게 격노하는 아버지도, 통제하고 침범하는 어머니도 다 내 모습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슬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늘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시부모님들에게, 사회생활에 만난 사람들에게, 세상에 대해 나는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그건 사실이라고 여겼다.

내가 다 옮고 그들이 틀렸고, 그들이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작은 일이라도 내 기분이 상하거나, 자존심이 상하면 그 상대방을 죽였다. 살렸다를 일주일 아니 한 달이 지나도록 매일 뒤 씹었다. 그 나마 일이 있어 일하는 동안은 잠시 잊고 있다가 잠자기 전에 또 격노하고 나의 진이 다 빠질 때 까지 미워하고 증오했다.

모든 화가 다 불타 없어질 때까지 마음속으로 화를 내고 나면 시원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나는 이런 나를 지금까지 “나는 오기가 강해서, 나는 에너지가 많아서...”라고 여기며 나의 좋은 장점으로 알고 살았다. 그들은 너무나 잔인하고 파렴치한 가해자들이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이것을 안 순간 나는 너무나 놀라게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였다. 내 남편에게, 아이들에게, 부모님들에게, 주변 사람들에게... 나는 빈약한 정신화로 세상을 내 멋대로 해석하고 그게 사실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들이 틀리고 내 생각이 온전히 옳다고 그게 사실이라고 믿었다. 내 주관적 세상이 진짜 세상인 줄 알았고 현실인 줄 알았다. “아! 그런데 그들은 그럴 수 있었다. 그렇게 말할 수 있고 그렇게 행동 할 수 있었다.” 나를 다시 들여다보았을 때, 나에게 떨어져 객관적으로 나를 보았을 때... 어릴적... 정원에서 사루비아를 따다 울고 있는 어린 내가 있었다. 겉으론 울고 있지만 마음속에서 엄마도, 아빠도 이해해 주지 못해 아니 내 맘을 알아주지 못해 슬프고 화가 난 그 아이가 있었다. 아직 자라지 못하고 그대로 그 자리에 있었다.

사루비아 꽃을 따던 내안의 아이~ “왜 나를 이해해 주지 못했어요.. 화내지 말고 때리지 말고, 말로 아니 다른 방법으로 보듬어 주지 못했나요? 엄마 왜 나를 당신 식으로 아닌 그냥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바주고 이해해 주지 못했나요? 늘 이상적인 잣대에 맞추어 강요하고 단 한번도 아니 지금까지 인정해 주지 않나요? ~ 나는 내안의 아이를 만났다. 왜 이리 눈물이 많이 나는지... 지금 내 나이가 이렇게나 많은데...그 아이는 하나도 안 컸다. 그냥 그대로 그 마음과 그 자리에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달래 주었다. 그 아이의 슬픔과 상실을 이해해 주었다.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는 멋진 그림을 그려주고 싶다. 세상은 행복하고 하늘은 푸르고, 태양은 밝고, 꽃은 아름답고...노래 가사처럼 사람은 꽃보다 아름답고...... 보석처럼 소중한 그런 그림을 만들어 주고 싶다....





4. '엄마' -분리님.

난 엄마를 여태껏 제대로 가져본 적이 없다. 태어났을 때부터 할머니댁에서 키워졌고 집에 돌아 와서도 우리 엄마는 나에게 무관심했다. 그런 나는 동생에게 시비를 걸었고 또다른 애착 대상인 일하는 언니와 자주 싸움을 했다. 나는 언제나 화가 나있는 상태였고 그러면 엄마는 또다시 나를 할머니댁으로 보냈다.

엄마가 나에 의해 좌지우지된 경험이 없다. 자기애 가득한 엄마는 자신이 제일 중요했고 나는 그냥 엄마와 똑같은 옷을 입어주는 부속품에 불과했다. 나는 늘 뾰루뚱한 표정이었고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지 못하는 그런 아이였다. 내가 집에 친구를 데려오는 날이면 부모님은 매번 그 친구의 단점을 지적했다. 난 그 이야기가 참 듣기 싫었다. 별 이야기도 아닌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인 내 탓도 있지만 엄마는 내 것에 대해 좋은 이야기를 해준 기억이 없다. 무조건 자기것만 좋고 남의 것은 하찮게 여기는 분이셨다.

유독 나에 대해 엄마는 시기가 많았다. 어린 내가 느낄 정도로. 나를 자랑스러워 하고 내가 잘 되길 바란다는 것은 의식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그런 다음엔 꼭 나쁜 말을 섞어서 내 기를 죽이곤 했다. 엄마도 나를 시기했지만 내 애착 대상인 아빠와 할머니가 엄마와 더 친하다는 사실이 나 역시 엄마를 시기했다. 그렇게 우리 모녀는 만나면 서로 싸우는 사이였다.

엄마는 본딩되어있는 할머니를 나에게 빼앗겼다는 불안이 있었을 것이다. 엄마가 사랑하는 아빠 역시 나에게 관심을 가질라치면 엄마는 나를 시기하고 못되게 굴었다. 그렇게 나는 엄마의 지지보다는 시기를 받고 자랐다. 엄마는 할머니에게 당한 것처럼 내 인생의 주인공으로 살려고 했다. 내 인생은 내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욕망에 의해 내 생각은 표현하지도 못하고 살았다. 내 생각을 표현해봤자 들어 주지도 않았으며 괜히 욕만 먹기 일쑤였으니까.

엄마의 편의에 의해 내 통금시간이 정해졌고 내 친구들이 정해졌다. 남자 친구도 사귀지 못했고 다양한 사회 경험의 기회를 놓쳤다. 그 어렵다는 취직을 했을 때도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 조용히 있다가 시집이나 가라는 쿠사리만 먹었을 뿐. 어릴적에는 내가 입고 싶은 옷보다는 엄마가 입히고 싶어하는 옷을 입고 다녔다. 나는 모든 아이들이 신고다니는 운동화를 신어 본 적이 없다. 언제나 발에 꽉끼는 구두와 너풀거리는 공주 원피스를 입고 동네를 뛰어 다녔다. 당연히 아이들과 놀 때는 뒤쳐졌고 매번 뒤쳐지는 나는 스스로 같이 놀기를 포기하고 아이들을 부러운듯 쳐다 보기만 했다.

어릴때부터 침범당한 나는 '하고 싶다'거나 '그러지 말라'는 말조차 하지 못했다. 엄마는 내 말을 들어주지 않았고 내가 화라도 내는 날이면 아빠에게 일러 집을 살얼음판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냥 집이 조용한 게 좋았다. 조용하게 넘어가는 게 편했다. 그렇게 나는 내 욕망을 포기하기 시작했다. 내 인생이 아닌 엄마의 인생으로 살았고 이렇게 살면 편한줄 알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없어지지 않고 내 안에 쌓여 가고 있다는 것을 수업을 통해 알았다.

내가 '나'가 아닌 거짓자기로 살았구나.

나는 심통맞고 내성적인 '내 주장을 못하는 아이'로 자랐다. "애, 왜 이래" "왜 이렇게 욕심이 많아?" 엄마가 항상 나에게 했던 말이다. 다만 엄마가 자랑스러워하는 눈빛, 그 눈빛이 그나마 나를 일어서게 하는 힘이었긴 했지만 한편으론 거짓자아로 살게 하는 밑거름도 되었다. 나는 내 욕심을 누르고 그 눈빛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 사랑 가득한 눈빛은 언제나 남동생에게 있었고 나에겐 싸늘하게 식은 말뿐이었다. 엄마의 시선에 맞춰진 삶, 내 삶의 선택권은 나에게 없었다. 내 표현, 감정을 드러내면 않되는 것인 줄 알았다.

그 결과 나는 박해불안으로 친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엄마에게 당한 것처럼 내팽게치는 반복강박을 재현하고 있다. 나도 아이에게 엄마와 똑같은 실수를 했다. 아이가 어릴적 말을 듣지 않는다고 집을 내쫓은 적이 많았다. 이것은 아이에게 큰 상처가 되서 다시 사춘기가 된 아이는 나에게 재현했다. 나 또한 아이의 말을 듣지 않고 아이를 압박했고 모든 탓을 아이로만 돌렸다. 나는 엄마에게 빼앗긴 내 인생을 아이에게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아이의 인생을 내 마음대로 가꾸려고 했고 아이 인생이 내 인생인냥 행동했다. 서로 소통 없이 내 마음대로. 거짓자기가 큰 나는 아이에게 완벽한 엄마로 보이려고 했고 아이에게 내 실수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아이는 이에 분개해 반발했지만 완벽함을 추구하는 거짓된 나는 더 큰 분노로 아이를 묵사발 만들곤 했다. 그러는 사이에 아이는 자기를 잃고 점점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사춘기인 아이도 내가 그런 것처럼 혼란스러워하고 정체성에 빠졌다. 요즘 난 아이가 불쌍하고 미안하다. 내가 아이를 망가뜨린 것같아서 정말 미안하고 측은하기 까지 하다. 내 편의에 의해 아이를 사랑하고 미워했구나.

난 아직도 거짓자기가 쎄다. 너무 쎄서 내 아픔조차 잘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조차 잘 모르고 있다. 나를 알면 무너져 버릴 것같은 두려움. 그래서 나는 관계들을 계속 파괴하고 있다. 그들이 나를 알까 두려워서.

하지만 이제는 내 아픔과 감정에 좀 더 솔직해지려한다. 그것이 유치하다 손가락 받더라도. 이젠 가면을 벗고 나를 위해 살고 싶다.




5. 나는 나쁜 엄마다. -애도님.

나는 나쁜엄마다. 우리 큰 아이에게 너무도 치명적인 잘못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자는 모습을 보면 너무 미안해서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이다. 내가 의도하지 않았고 그냥 모르고 아이에게 잘못을 했어도 내 아이의 가슴에 상처로 남았을 것들을 생각하니 너무 괴롭다.

큰 아이 출산 후 45일만의 출근, 아이를 친정에 맡끼고 잠깐씩 주 2-3회의 짧은 만남, 연년생 동생의 임신과 출산, 두 돌까지 네번의 이사, 17개월 어린나이에 종일반 어린이집 등원. 이로인한 말더듬과 자해, 지속되는 분리불안 등의 문제행동. 어린아기가 감당하기 너무나 힘든일들을 나는 큰 아이가 겪게 만들었다. 나는 밤마다 아이의 자는 모습을 보며 매일매일 사죄한다. "미안하다. 미안하다.. 내 문제가 너무 커서 네가 힘든 줄 생각도 못하고.. 정말 미안하다.. 용서해다오"


나는 왜 우리 아이를 이렇게 힘들게 했을까? 그건 의식에서 와는 달리 무의식에서 엄마와 분리되는 대신 끊임없는 의존을 유지하고 싶은 댓가를 아이에게 치르게 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남편은 아이를 집 근처에 맡기자고 했는데 나는 아이의 정서나 심리적 안정, 엄마인 나하고의 애착대신 당시 사기를 당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엄마와 아빠를 돕기 위한 생각이 먼저 들었기에 아이대신 부모를 우선으로 두고 아이를 맡겼다.

게다가 둘째의 연년생 임신과 출산은 엄마와 살림을 합치는 자연스런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한집에 살면서 친정엄마와 남편과의 갈등이 생기게되자 나는 큰 아이가 친정엄마를 잘 따르는 것을 이유로 친정엄마가 함께 사는게 당연하다는 이유를 대기 위해 큰 아이를 내 자식이 아닌 친정엄마의 아이로 자라게 만들면서 나는 큰 아이의 양육에서 거의 손을 놓다시피했다. 결국 우리 큰 아이는 나와 엄마의 의존을 합리화시키면서 많은 부분에서 상처받으면서 자라게되었다.


그럼 나는 왜 이렇게 엄마와의 분리가 어려웠던 것일까? 그것은 나를 곧 자신이라고 생각하고 사는 엄마가, 무슨일이 생기면 언제나 척척해결해주었기에 나는 결혼을 해서도 나 대신 싸워주고 심판봐주고 나를 위해 희생해주는 엄마의 노고가 필요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이제껏 노력을 하고 살아본적이 별로 없다. 선물 사주고 예쁘게 부탁하는 법을 아는 것 만으로도 나는 삶에서 필요한 것들을 얻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런 연장선으로 나는 엄마와 함께 있는동안 정서적으로 마음이 너무 불편해도 조금만 참으면 아이 양육, 가사 등 내가 원하는 것들을 얻을 수 있기에 나는 견뎌내며 살았던 것 같다. 결국 우리 아이를 힘들게 하면서 말이다.


나는 왜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던걸까? 나는 내 문제로 인해 아이가 말을 더듬고 벽에 머리를 부딪히고 손가락을 빨고 작은일에 분노하며 소리를 지르고 울때도, 우리 아이가 무엇이 힘들까 대신 왜 쟤는 다른 아이와 달라서 나를 힘들게할까만 생각했지 아이의 마음을 읽으려 하지도 이해하려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나는 남편을 닮아서 혹은 친정엄마의 양육 태도의 문제를 지적하며 결국 책임지는 일에서 언제나 나는 예외이고자 항상 회피했고 부인했다. 지금생각하면 당시의 내 모습이 너무 이기적이고 무책임해서 화가 나지만 당시의 나는 그런 인식을 할 수 없을 만큼 유아적이고 미성숙해서 왜 모두들 나를 힘들게 하는지를 원망하며 남편, 아이, 친정엄마까지 모두 다 괴롭혔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다 괴롭혀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 그리고 계속 회피하는 대신 같은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하고 내 일에 책임을 지는 태도가 필요함을 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나'를 알고 난 후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도 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 사이의 괴리에서 나는 오늘도 괴롭지만 그 노고와 수고는 나와 내 아이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기에 나는 노력할 것이다.





6. 아빠의 존재란.. 어떤 것일까.. 나는 지금 아빠를 찾고 있는 중이다. -상실님.

아빠하면 떠오를 만한 추억은 얼마 되지도 않지만, 그 얼마 안 되는 추억도 사실 좋지 않은 것 투성이었다. 딸을 사랑하는 훌륭한 아빠는 나의 이상이었고, 그런 이상적인 아빠상은 삶 속에서 사랑하는 이상형의 남자에 대한 지배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절대적으로 나를 사랑하고, 아껴주고, 보호해주는 영화 트와이라잇의 뱀파이어 에드워드같은 나와 하나로 본딩된 이상형의 남자말이다. 그런 변함없고 아낌없이 주는 사랑을 평생 찾고 있었다.

뚜렷하게 기억나지는 않는다. 내가 자란 어린 시절을. 하지만 몇 년 동안 힘든 노력 끝에 내가 왜 기억을 억압했으며, 어떤 무드로 살았는지 떠올렸다. 지금도 그런 기억을 회상하게 되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이다. 떠올리면......., 너무 우울했다. 생기 없는 병원, 지하 영안실 같은 분위기가 바로 적절한 표현 같다. 우리 가족 모두 숨 죽여 엄마만 보고 있는 죽은 집 분위기.

늘 지쳐있고, 세상 피해자라 여기고 살았던 엄마가 아기일적 나를 미러링 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본인 스스로 추스르며 살기도 벅차고 힘든데, 울 엄마에게 있어 아이들만을 위해 전적으로 에너지를 쏟는 양육이란 불가능 해 보인다. 그러니, 난 자라며 늘 사랑에 굶주려 있었고, 엄마 외에 아무도 없던 어린 시절(엄마와 내가 본딩되어 있어)엔 엄마의 사랑만 몹시 갈구 했던 거 같다. 내안엔 아무도 없었다. 즉, 나에게 가족이란 오로지 엄마 뿐이었다.

몇 년 전 자기애에 관한 수업 중 아빠의 존재를 찾고 깜짝 놀라 한참을 방황했다. 나도 아빠가 있지만, 도대체 우리 아빠는 어디 있었던 걸까... 얼마 전 까지도 막연하게 ‘나도 아빠가 있었는데.. 아빠랑 무얼 했을 까’하며 아련하게 존재만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경계선 수업을 듣고 난후 알았다. 왜 아빠의 존재감이 왜 느껴지지 않았었는지. 나의 아빠는 그동안 어디 있었는지.

경계선자인 내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와 내가 한 사람처럼 붙어 있어 아빠가 들어올 공간이 어디에도 없었던 것이다 - 난 알 수 없지만, 아마 아빠는 그 공간 안으로 들어오려는 애를 엄청나게 썼을 것이다 - 순간접착제 같은 끈끈이 엄마랑 나는 꼭 붙어 버려 아빠를 밀쳐내고, 관계를 끊어 버렸다는 슬프고도 불편한 진실을 깨달았다. 지금도 난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을 느끼고 있다. 더욱이 이제야 발견한 아빠의 존재는 늙고 힘 빠진 도움 필요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이렇게 평생을 잃어버릴 번한 아빠를 이제 찾았는데 도통 어떻게 관계해야 할 지 모르겠다. 솔직히 너무 어색하고 불편하다. 아빠의 어린 딸이라면 분명 재롱도 부리며 사랑 받았을 텐데... 난 어찌해야하는 걸까... 오히려 내 도움이 필요한 노인이 된 아빠를 보살펴야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내게 있어 아빠의 존재는 오로지 엄마가 말해준 그 이미지였다. 나쁘고, 무능력하고, 하면 안 되는 거 투성이들만 해서 매번 실패하는 남편... 엄마는 본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투사된 나쁜 남편만을 내안에 정신화 시켰기 때문에 가슴 아프게도 이제야 찾은 아빠가 실제로 어떤 사람인지 난 잘 모르겠다. 그래도 내가 느끼지 못한 거 이상으로 날 사랑하겠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차가왔던 엄마가 내게 사랑한다 말해주거나 안아준 기억이 거의 없다. 아마 그래서 내가 아이들에게 사랑한다 진심으로 표현하는 게 어색하겠지만.. 사랑... ... 나는 상대방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 인 잘 모르고 있는 거 같다. 무조건 나와 같은 생각으로 (마치 엄마가 갓난아기를 미러링 하 듯) 오로지 나만 바라보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 했고, 그런 사랑을 쫒아 지금껏 살아 왔다.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힘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도 아마 성숙하지 못한 이기적인 사랑을 요구 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로 빙의 한 나는 엄마가 그랬던 거처럼 내 가족에게 똑같이 삶을 되풀이 시키고 있었다. 100%의 내 감정, 기분으로 만 가족을 지배 했다. 내가 우울하고, 기분이 안 좋거나, 아프거나, 무슨일이 생기거나, 힘들거나, 불안하면 식구 모두를 똑같이 전염 시켜 만들고, 내가 풀리면 상관없이 모두 다시 빨리 풀어지도록 강요했었다. 참 지금 생각 하니. 얼마나 상식 밖의 기준 없는 생활이었던가...

내가 불안 할 때는 가만히 있는 아이들에게 소리치며 너는 공부도 안하고 애가 왜 그 모양이냐고 비난을 퍼붓다가 바로 불안이 풀리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너는 할 수 있어! 엄마가 도와 줄께! 엄마는 니들 밖에 없어 니들 때문에 살아’ 하며 애들을 흔들고는 부담감을 지어주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아찔한 순간들이었다.

또, 나는 중간을 몰랐다. (하긴 음식도 짜고 맵고 뜨겁고 차갑고 신 음식이 좋았지... ) 상대하는 모든 사람은 좋은 사람과 나쁜 인간으로 구분지어 이도저도 아닌 사람은 회색인간으로 젤 싫어했다.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그 기준은 내 마음이었다. 내가 다 맞고 옳다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내 말에 의심하거나 거부 하는 사람은 다 나쁜 사람 말이었다.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고 오로지 결과만이 존재하는 내 세상만이 현실이었다. 남편이 언제나 내게 해주는 거 없이 같이 사는 게 지겹게만 느껴지는 현실...

나 아닌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생각하고, 느끼고, 기억 한다는 건 나에게 진짜 고문이었다. 명료하고 뚜렷한 기분 보다는 모호하고 희미한 느낌에 휘둘려 이리저리 내 맘대로 살면서 나와 타자와 구별 하지 못하는 위험한 생활을 하며 조절 되지 않은 불안함에 스스로 사로잡혀 고통 했다면 허전하고 가치 없게 느껴지던 내 삶의 의문이 이제야 스르르 풀린다. 사실 내 고통을 느끼며 자책 하는 건 쉽고 스스로를 편안하게 한다. 아마 아무리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고 약도 먹지 않으며 아픔을 극대화 시키는 이유도 이 때문이겠지...

올 해가 다가는 마무리 점에서, 또 분석 수업을 듣고 정리 하는 시점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나는 내 자신을 느끼는가... 내가 누군가... 정체성에 꽂혀 나와 타자의 경계점을 찾으려 노력 하고 있다. 그런데 날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고 남을 사랑하는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느끼고 살아 갈 수 있냐는 것이다. 친밀감으로 현실을 살려는 노력이 내게 가장 의미 있는 숙제인데.. 사실 사랑하는 일 보다는 미워하고 증오하는 일이 훨씬 쉽기 때문에 평생을 노력하며 살아야 할 것 이다.

오년 전 만해도 세상을 엎어 버릴 듯한 분노를 가슴 안에 품고 살았다. 사실 그것도 내 안에 그렇게 큰 분노가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고 살다가 오년 전부터야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고 알아내려 노력해왔다. 세상에 마음속 가득한 분노가 그렇게나 컷을 줄이야.... 온갖 노력으로 느끼고, 애도하고, 날 위한 일을 만들고 하며, 이제야 나는 사람들과 다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누가 알까 만은 내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 된 사실이 얼마나 큰 엄청난 일이 라는 것을............

사실 나는 남을 위해 삶을 송두리 채 희생하며 살고 있었다고 생각했기에 다른 사람에게 이렇게 잘하는 인간이 세상에 없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그건 어릴 적 엄마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 희생한 내 어릴 적 조숙에서 나온 것이고, 진심으로 성숙한 관계를 가지며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었고, 표면적인 일시적 맞춤으로 나중에 더 큰 보복으로 앙갚음을 하는 전 단계였음을 알아냈다.

부모로 받은 게 없어 생긴 열등감이 참 많다. 아니 사랑받고 인정받지 못했다는 게 더 가까울까..? 열등감이 많아 누군가 내말에 조금만 반응해도 불안이 응집되지 않고 화가 치밀었다. 목욕탕에서 이를 닦고 있을 때였다. 한 할머니가 ‘애기 엄마.. 이 닦을 때 물을 좀 잠그고 하지 그래..’라고 하시는데 순간 울컥했다. ‘물 아끼고 싶음 지네 집 물 이나 아낄 것이지 왠 지적질...!’ 그런 생각을 하며 남편에게 말했다. 남편이 ‘니가 잘못했네.’ 라고 하는 순간 대폭발이 일어날 뻔했다. 죽이도록 싸우며 나를 정당화 시키고 싶었지만, 방으로 문을 (쿵) 닫고 들어가 씩씩 앉았다. 한참 가만히 있으니 서서히 웃음이 났다. 사실 별일도 아니었고, 지적도 아닌 정중한 말투였다는 사실도 기억했고, 또 내가 좀 물을 막 쓰지... 하는 생각이 들며 아이구 내가 또 그랬구나... 하는 생각으로 씁쓸해졌다.

요즘 격노와 깨달음을 반복하며 쓸데없이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진짜 해야 할 일을 방해 받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남의 말을 듣고 인정하는 일을 연습하며, 드는 생각이다. 만일 내가 못 받았다면, 못 받았다는 이유로 누군가를 밟고 복수를 해야 하는가.... 나에게 사랑의 크기란 다시 말해 누군가가 날 위해 희생 하는 크기와 같다는 것일까.... 내가 틀리더라도 다 맞다하고, 잘못했어도 눈감아 주며 못 본 척해 주는 게 정말 사랑일까...

대답은 ‘아니다.’ 라는 마음으로 성숙한 사랑을 할 수 있도록 지금 이 시간 기도 해본다.



7. <이별과 상실> -조숙님.

고3 가을, 수능준비에 열의를 다하고 있어야 하는 나는 공부 대신 창 밖 노을 진 하늘을 쳐다보며 한숨을 짓고 있었다. 어느날 담임 선생님께서 교무실로 부르셨다. “요즘 떨어지는 낙엽만 봐도 눈물이 나오지?” 이 말에 무너지듯이 울음을 터뜨렸다. 그 선생님의 말이 너무나 따스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나를 이해하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가슴 아프게 고마웠다.

그리고 이것이 사춘기의 반응이 아닌 우울이라는 것을 수업을 통해 알게 되었을 때 놀라고 당황스러웠다. 맞다. 난 그때 자살도 생각해 봤으니까. 겉으론 얌전하고 공부 잘하고 부모가 시키지 않는 일은 하지않았다. 거짓자기로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인지 시댁에서 분가하기 전 항상 내 의견도 말하지 못하고 늘 웃으면서 좋으면 좋은대로, 싫으면 싫은대로 살아왔던 나는 맞춰주어야할 상대가 없어지자 심한 박탈감을 느꼈다. 정말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무기력하고 작은 일에도 화와 짜증을 많이 냈다. 이런 짜증과 화는 당연히 약한 아이들을 향했고... 생활은 계속 전쟁이었다. 차라리 다시 시댁으로 들어가고 싶었다. 남편의 도움이 절실했던 그때 나는 또 자살을 생각했다.


엄마의 손길이 가장 필요한 절대적 의존기에 나는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항상 혼자였다. 그래서인지 표현되지 못하는 속앓이로 위장병이, 타인에게 맞추기 위해 애썼던 내 머리는 편두통으로, 누군가에게 해를 당하지 않을까하는 걱정은 밤마다 불면증으로 그 괴로움을 드러내었다.

명치 끝이 무언가가 꽉 막고 있는 듯한 답답함으로 침을 끊임없이 삼키고, 가슴을 주먹으로 치고 한숨을 쉬는 것도 끝이 없는 내 일상이었다. 이러한 심인성 증상은 아마도 경계선구조를 가지고 있는 나의 무의식에서 거짓자기와 참자기의 충돌에 의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빠의 알콜 중독으로 인한 엄마에 대한 구타와 부부싸움은 엄마의 보복으로 우리 형제에게 돌아왔고 그 중에 맏딸이라는 이유로 언제나 언니가 엄마의 화풀이 대상이었다. 나는 울부짖고 싶었다. 엄마를 때리지 말라고, 언니를 때리지 말라고. 그러나 나는 비겁하게도 말하지 못했다. 입을 꼭 다물고는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좋은 엄마, 좋은 부모에 대한 환상을 갖고 나는 엄마이자 딸로 살아왔다. 좋은 부모,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좋다고 생각되는 타인의 행동이나 말을 의심없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고 따라하는 '따라쟁이'가 되었다. 내가 없는것도 모르고 말이다. 나의 부모님은 사랑뿐만이 아니라 나에게 가정의 아늑함마저 빼앗아가고 나를 너무나 조숙하게 만들었다. 너무 화가난다. 사랑받지 못해 사랑을 주지 못하는 나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너무 슬프다. 진심으로 대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몰라 머리로 생각하고 늘 한 박자 늦게 반응을 한다. 때론 그것이 아이에게 맞게 반응한 것인지도 잘 모른다.

텅빈 마음, 멍한 눈빛, 지금의 내 모습이다. 아빠는 내가 착해서 좋다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하기도 했지만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게으르다고 핀잔을 주는 상처를 어김없이 주었다. 그 상처는 하기 싫어도 얼른 알아서 상대들의 기분을 빨리 맞추고 의무로만 행동하는 거짓된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지금은 아예 나의 참자기를 찾기 힘들어졌다.

"어떤 것이 정말 나인지 모르겠다!."

둘째 아이를 가졌을 때 또 딸이기를 원했다. 남들에게는 “동성이면 커서도 잘 지낸다”더라는 말을 했지만 사실은 언니와 내가 부모님에게 하는 것처럼 ‘딸이라면 커서도 나를 버리지 않고 돌보겠구나’ 라는 생각이 더 컸다. 지금의 딸에게 나는 너무도 의존적이었던 것이다. 나는 언니에게 이런 말을 한적이 있다. “언니는 엄마가 싫다고 하지만 그래도 싸우면서 미운정이라도 들었지. 나는 그런 정도 없어” 웃으면서 말했지만 목이 메이는 말이었다.

언니와 엄마의 관계가 나는 부러웠다. 그래서 나는 무의식에서 내 딸과의 분리를 불안해하고 내 옆에 묶어두려 한 것 같다. 내 기분에 의해 딸 아이를 좌지우지하고 통합된 한 인격체로 기르지 못했다. 이러한 나의 분리에 대한 불안은 남편에게도 적용되었다. 어느 날 도움을 청하는 나에게 “네가 나를 부르면 또 시키려 하는 것 같아서 싫다”는 남편의 말에 나의 말투나 행동이 얼마나 남편을 기분 나쁘게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아랫사람을 부리듯 명령조로 말하고 내말을 듣지 않으면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서 나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나의 어린 시절이 순응과 조숙이었다면 청년 때부터 지금까지의 시간은 의무만 있는 시간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나는 나와 맞지 않는 전공에 대해 스트레스를 받았고, 성적도 노력한 것에 비해 나오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열등감이 성적에 의해 자기비하가 되었고 나를 좌절시켰다. 그리고 그냥 그런 회사에 들어가서 일에 대한 성취감이나 만족감 없이 지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 결혼했다.

결혼생활 또한 남들이 하니까 아이 낳고, 아이 기르고 지금껏 의무로만 그렇게 살아왔다. 그래서인지 잠자리에서도 나는 의무감으로 좋아하는 척하고 머릿속으로는 언제 끝나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모든 일에 대해 느끼는 행복감이 나에게는 없다. "왜 했지? 빨리 끝내자. 귀찮아." 이러한 부정적인 생각들뿐이다.

난 아직까지 환상 속에서 살고 있다. 내가 만든 거짓된 현실속에서 내가 다 맞고 내가 최고이고, 지금까지 정말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잘 살 것이라는 환상!! 그러면서도 시작도 하기 전에 결말을 새드엔딩으로 만들어 놓고 안 하길 잘했다고 나의 선택에 대해 선견지명이 있다고 칭찬한다.

조숙과 순응으로 인해 지금까지 거짓으로 살아온 나는 내가 없기 때문에 우유부단하고 융통성이 없이 살아왔다. 늘상 힘이 들어도 남에게 기쁨조로 살아왔다. 그리고 그 힘듦을 가족에게 보상 받으려는 듯 남편과 아이들을 괴롭혀왔다. 또한 자기연민에 푹빠져 나를 외롭고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가족에게는 헨젤과 그래텔에 나오는 마녀같이 과자와 사탕으로 그들을 유인하고 기름 솥에 넣어 잡아먹겠다는 식의 무서운 협박으로 나만의 환상속 가족의 이미지를 가지고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고 했다.


생물학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심리적 재탄생'을 하고싶다. 부모 교육을 통해 나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다시 태어나는 경험을 하는 듯하다. 태어난 후 홀딩과 미러링을 통한 정신과 신체의 통합, 그리고 현실과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 이 세상에서 평범하게 나를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그런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가슴 벅찬 행복감도 느껴보고 이러한 좋은 것들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전해 주고 싶다.

무섭고 표정없는 엄마가 아닌 행복하고 즐거운, 진심으로 우리 가족을 사랑하는 그런 내가 되고 싶은 것이다.



8. 교육을 마치며... -이별님.

사람들은 나를 “참 잘 컸다”라고 했다. 나도 그런 줄 알았다. 어느 순간 이 모든 게 “상실에 의해 생겨난 방어기제”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많은 자식 중에 끝으로 태어난 나는 하나뿐인 바로 위의 오빠를 위해 외갓집에 맡겨져야 했다. 엄마는 부지런하고 인자하기로 소문난 외할머니가 본인보다 나를 더 잘 키웠다고 당당하게 말했었다. 나도 그러길 바랬던 것 같다.

어린 난 가끔씩 가족모임이나 여행에 끼면서 초대된 손님처럼 우리가족을 구경했었던 기억이 있다. 어린 나에게 그 가족은 참 좋아 보였다. 특히 아빠가 너무 멋져 보여서 어떻게 엄마가 아빠랑 결혼했을까를 물었던 기억도 난다. 하지만 난 늘 손님과 같은 기분이었다. 4살 때 유치원에 다니기 위해 온 우리 집은 무척 낯설었다. 죽을만큼 싫은 어색함과 함께 죽어도 이 집의 가족이 되어야만 한다는 의무감(?)을 같이 느꼈던 것 같다. 난 동화되고자 노력했다.

문제는 엄마였다. 4년이란 세월이 지나 나타난 막내를 엄마는 늘 잊었다. 유치원에 가는 것도, 유치원에 있는 나를 데리러 오는 것도 까먹었다. 난 친구들이 한참 노래부르고 있을 때 살그머니 들어가야만 했고, 친구들이 모두 누군가와 집으로 간 뒤에도 혼자 남아 하염없이 기다려야만 했다. 난 울 수도 화를 낼 수도 없었다. 그냥 엄마의 잊음이 끝나기만을……그래서 날 기억해 내기만을 기다렸다.

세월이 흘러 가족들과 한집에 사는 것이 익숙해졌다. 나의 상처는 사라진 듯 보였다. 엄마가 나를 기억하지 못해도 난 내가 원하는 시간에 내 스스로를 챙겨낼 수 있을 만큼 자랐다. “멋진 어른”으로 성숙해 간다고 생각했었다. 결혼하기 전까지는.

엄마에게 융합하지 못한 욕망은 결국 남편에게로 향했다. 남편이 원하기 전에 200퍼센트 해놓고는 그가 찬사를 날려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항상 돌아오는 것은 아주 작은 필요함마저 못 채운 것에 대한 그의 격노였다. ‘배은망덕한 놈!’ 화가나고 왠지모를 불안감이 밀려오면 난 주변정리를 했다. 쓸고, 닦고, 줄을 맞추고…… 생명력 없는 생활용품들이 내 말을 잘 듣고 나면 불안감이 줄어들고 내가 능력있는 사람 같았다. 그러고는 나에게 불안감을 일으킨 남편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도저히 내가 원하는 대로 안 되어먹는다. ‘배우지 못한 불쌍한 것! 쯧쯧!’ 그러고는 “잘 큰” 내가 한번 봐 준다고 생각했다. ‘늙어서 두고보자!’ 는 커다란 보복을 속으로는 철저하게 준비해 두는 것도 결코 잊지 않았다.

남들이 칭찬할 만큼 꽤 괜찮은 “거짓자기”를 가진 나였기에 남편을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었다. 난 항상 ‘good’ 쪽을, 남편을 항상 ‘bad’ 쪽에 있기를 내가 원했었다는 것을 그땐 몰랐었다. 나만 힘든 줄 알았다. 그가 내가 원하는 엄마의 모습을 해주지 않아서 내가 벌을 주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엄마없이 살아야 했기에 난 나의 매니저가 되어 타인의 부러움을 살 만큼 “완벽한 거짓자기”를 만들어냈고 그것으로 가장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대상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난 비로소 나의 외로움을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할머니에게서 큰 나에게 “엄마”라는 단어는 별 느낌이 없다. 생전 가 보지 못한 먼 나라 같다. {그게 뭔지를 알아야 차이를 알지 않겠나하는 생각이 수업을 들으며 내내 맴돌았다.) 나의 엄마는 공격적이지도, 비도덕적이지도, 비인격적이지도 않았다. 몸도 건강하셨다. 엄마는 나에게 소리를 지르지도, 날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한번도 “내 엄마”인 적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엄마는 늘 “우리 엄마”였다. 한번쯤은 나만의 엄마가 되어서 나를 특별한 존재로 느끼게 해줄 것 같아 기다렸건만, 매번 내 차례가 되면 기억을 못하고 건너뛰는 엄마에게 난 화가 났었다. 그러나 한번도 내 감정을 제대로 말해 본 적은 없다. 그때마다 난 유치원에서 혼자 남아 기다리던 아이가 되었다. 또 버림받을 까봐, 혹시 실수로라도 엄마가 난 그녀에게 중요치 않다고 말해버릴 까봐 불평도 못하고 또 기회를 주고야 만다. 그러고는 밖에 나가 “배우지 못한 불쌍한 것들”을 향해 화를 낸다. 약속시간에 늦고, 순서를 지키지 않는다고!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엉뚱한데 뱉어놓고는 올라오는 불안감에 어리둥절해 한다.

난 완벽한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내 방식으로 열심히 사랑해주었다. 절대로 시간에 늦지 않도록 노력했고 혼자 외롭게 두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이는 때때로 불평도 하고, 피치 못할 상황에 몇 분 늦은 나에게 늦게 왔다고 투덜댔다. 나의 “거짓자기”엄마는 소리치지도, 화를 내지도 않으면서 “미안, 미리 떠났는데 차가 너무 막혔어. 엄마가 미안해!”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아이에게 다른 말을 하고있는 내가 있다. ‘네가 딴 엄마한테 안 태어나서 지금 배부른 소리하고 있네. 넌 이것도 기다린거라고 화를 내니? 정말 내가 얼마나 완벽한 엄마가 되려고 노력하는데!’. 아이의 감정에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아이가 하는 말이 뭔지도 못 알아들었던 것 같다. 미안하다는 나의 말이 한번도 진심이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어릴 때 받은 상처가 너무 커서 내가 내 아이에게 주고있는 상처는 사랑인줄 알았었다. 진심으로 미안하다. 나의 완벽함에 대한 착각이 무너진 순간 난 드디어 땅에 발을 디딘 것 같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편한 숨이 쉬어진다.

하나씩 불편한 진실의 근원이 드러날 때마다 오히려 조금씩 나에게 너그러워질 수 있게 됨이 신기하다. 용기도 생긴다. 그래서 조그마한 소리로 엄마에게 “내 순서인데……”를 해본다. “아~ 네 순서구나~!”하는 엄마의 악의 없는 반응에 허탈해지며 그녀의 무의식 안에 없는 나를 재확인한 것 같아 또 한번 속에서 분노가 올라온다. 보상받고 싶어진다. 소리치고 싶어진다. “난 힘들다구!”

모든 열쇠가 나의 무의식 안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아갈수록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문제를 찾아내서 제대로 고쳐버리고야 말겠다는 당찬 결심을 해본다.




9. 큰 벽 -애착님.

위니캇 수업을 들으며 다시 한번 건강하지 못한 엄마와 나의 모습을 보며 절망스럽고 암담한 기분을 느끼게 되었다. 나의 엄마는 심한 경계선자이다. 사실과 감정을 구분하지 못하여 늘 감정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그것이 진실인양 믿으며 어린자식에게도 강요하고, 엄마의 기분으로 온집안을 좌지우지하였다.

자식중에서도 큰 아이인 언니만 편애하여 온 관심이 언니에게 집중되었는데, 온 정성을 기울이면서도 경계없이 아버지의 허물까지 얘기하여 언니의 정신을 심하게 침해하기도 했다. 그러한 엄마와 언니를 보며 내가 느낀 것은 큰 벽이었다. 엄마와 언니의 지나친 유대를 혐오하면서도 한편으론 밀착되어있는 모습이 애정이라 여겨져 질투를 느꼈으며, 결코 내가 낄수 없는 관계인 것을 알기에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포기"와 "체념"이 당시에 나의 느낌을 대변하는 말이었으며, 집에서도 물 흐르는 듯 존재감없이 살면서 엄마의 예측할 수 없는 공격을 피하며 살았다.

엄마는 모든 걸 자기 중심적으로 해석하였다. 학교방문이라도 하면 아이의 학교생활보다는 친구 엄마들과 자신을 비교하기 바빴고, 맘에 들지 않는 분의 자식이 나보다 공부를 잘하면 정말 무섭게 혼이났다. 한편으론 아버지를 부끄러워하며 자신이 아버지보다 더 좋은 배우자를 만나지 못했음을 한탄하며 자식들이 맘에 들지 않는 행동이라도 하면 우리는 아버지만의 자식인양 야단치며 자신의 원가족만을 그리워하셨다.


엄마의 공격은 또한 겸손을 가장하며,"내자식은 내가 잘 안다"하시며 칭찬하는 상대방앞에서 자식들을 사정없이 깎아 내리셨다. 나 또한 얼마전 딸아이 미술학원의 선생님께서 '아이가 태도도 바르고 열심히 잘한다'라고 하신 칭찬을 집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말로 계속 부정하고 나서 집에와 곰곰히 생각해보다가 결국 나도 엄마의 시기심을 갖고 있구나 하고 당황한적이 있다.

탄생부터 별로 환영받지 못했음을 누누히 강조당하며, 엄마를 신경쓰지 않게 하는 울지않는 아이라는 칭찬만을 듣고 자라난 나는 '미러링'을 수업시간에 들었을때 큰 충격을 받았다. 아이가 살아있음을 엄마에게서 느끼고 정서가 생기는 과정이 내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어렸을때 나는 울지않는 아이였기에 엄마는 방안에 거의 하루종일 나를 두고 일하셨고 나는 엄마의 정서적 돌봄대신 '공허'만을 담고 큰 것 같다.

아이는 생물학적 욕구만 채워주면 저절로 크는 줄 아는 나의 무지와 정서상의 문제때문로 딸아이는 나에게서 당연히 받아야 하는 정서적 지지를 받지 못하고 좌절을 경험했기에 지금도 갑작스련 격노로 나를 당황스레 만들곤 한다.

또한 엄마가 사실과 상상의 경계없이 자신의 생각을 자식에게 강요했듯이 나도 내가 아프거나 배고프면 아이에게 유난히 민감하게 많이 먹이려 했고, 남편이 나의 생각에 적극적으로 동조하지 않으면 큰 불안에 휩싸여 내 의견을 포기하고는 남편을 많이 원망 하곤 했다. 이러한 행동이 나와 남이 다르다는 것, 아니 나와 남이 각자 존재하다는 사실 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경계선 구조의 문제라는 걸 알게되었을때 나는 나 자신이 정상이라는 믿음에 큰 타격을 받았으나 한편으론 항상 사람들과 소통하는게 힘들고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남편에게 의존하려는 나의 성향이 설명됨을 알게 되었다.


엄마가 갑작스런 사고로 내가 임신중에 돌아가심으로써 나는 엄마에게 받지 못한 사랑과 관심을 불평하지도 못하고 그냥 가슴속에 묻어버리고 지금도 때때로 엄마를 원망하지만 감작스런 죽음에 대한 연민과 슬픔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올라오곤 한다. 아직도 나는 엄마에 대한 분노와 연민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내가 내사한 엄마를 재현하고 살고 있으며 때로는 이 사실을 깨닫고 몸서리치기도 한다.

나는 사람들과 접촉하는 것이 힘들고 내 안에 남을 공감하는 능력이 없다는 사실이 참 슬프고 커가는 아이를 바라 볼때 나같은 어려움을 겪게 될까봐 두렵기도 하다. 내 아이가 나를 보통의 엄마로 기억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수업을 하며 절망도 했지만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표현하고 고민하는 기회를 갖게 된 내 생애 최초의 시간이기도 하기 때문에 참 고맙고 귀한 시간이라는 생각도 든다. 부디 나 자신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작은 노력이라도 실행하여 주위 사람들과 관계에서 느끼는 소소한 기쁨을 누리며 사는 미래를 그려본다.




10. 경계선인격 -의사소통님.

한 학기동안 경계선 인격에 대해 공부하면서 내가 가진 인격 구조를 조금이나마 들여다 보게 되어 참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수업 내용이 거의 내 모습이고 생활이여서, 내 문제와 대면하는 것이 괴롭고, 힘들고, 피하고 싶은 시간이였지만... 경계선 인격구조 수업을 마친 지금의 심정은 새로운 일상을, 새로운 관계를, 새로운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되어 내 삶이 새로워질 수 있겠다라는 희망과 용기를 가져 본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내가 엉터리 의사소통을 하고 사는지 몰랐다. 예를 들어 남편이 "이건 당신이 잘못한거야"라고 이야기 해줄 때 그 말을 어떻게 알아듣고, 어떤 반응을 해왔는가를 되짚어 보면서 내가 가진 경계선 구조로 말마암아 남편과 내 자녀들과의 관계와 생활들이 그렇게 힘들었구나 하는 아픈 이해가 생겨났다.

남편에게 사소한 일로 '이건 당신이 잘못한거야'라는 말을 듣게 되었던 어느날, 왠지 모르게 기분이 나빠지고 은근히 화가 났다. 왜 화가 나는지 내 마음을 알 수 없었던 나는, 과거의 딴 얘기들을 끄집어 내어 몇 시간씩 남편에게 같은 얘기들을 반복하고 대화의 마지막은 늘 그래왔듯이 "그래 우리는 15년전에 결혼하지 말았어야 되는데..."로 끝을 맺었다.


수업을 들으면서 상담 중이였던 나는 선생님과 이일을 다루게 되면서 내가 왜 이렇게 화가 나고 왜 이런 말을 하게 되는지 알게 되었다. 이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이 모진말이 얼마나 남편을 아프게 낙심시키는지 이제는 느낄 수 있어 가슴이 아프다.

나는 지금 껏 살아오면서 반복해오던 파국적인 말들에 가슴아파하지 않았고, 그런 말을 상대방에게 꼭 내뺃어 주어야 화가 풀렸다. 내가 이렇게 사랑하는 남편과 자녀들에게 고통과 슬픔을 주었다. 또한 나의 진정한 마음을 모르고, 내가 자라왔던 부모환경에서 만들어진 '경계선 인격구조'대로 그냥 그 아픈 말들이 익숙했다.

부정적인 말을 들으면 버려질까봐 두렵다고, 사랑받고 싶다고 그게 내 마음이고 그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그걸 말하는 대신 파국적인 "끝낼 걸" 하는 말을 하는 나... 목이 매이고 가슴이 아프다. 남편이 "이건 당신이 잘못한거야'라는 말을 하면 나는 '난 당신이 싫어'라고 잘못 알아들어 먼저 남편을 밀어내고, 남편과의 그 동안의 관계를 한 순간에 평가절하해버리고 말았다.

사소한 실수를 지적받고 부정적인 상황에 접할 때마다 난 그것이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내 존재에 대해 거부로 받아들여져서 상대방과 나의 관계를 파괴하는 말들을 반복하고 살아왔다. 그렇게 잘못된 의사소통을 하면서 40여년을 살아오고 있었는지 정말 몰랐다.

그 동안 아이들에게 지적하면 왜 존재의 부정으로 받아들이는지 모른다고 분통을 터뜨려왔었는데 그게 내 모습인 것을 몰랐다는 것이 기가 막힌다. 이런 잘못된 의사소통으로 아이들을 대해와서 아이들이 그렇구나하는 이해가 생긴다. 나를 알게 되면서 아이들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진다. 앞으로 아이들을 참아주고 기다려 줄 수 있는 여유가 더 생길 것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나의 인격을 형성하고 있는 경계선 구조와 맞설 것이고, 지고 싶지 않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까? 라는 걱정도 된다. 내 경험된 인격대로 내 일생이 파괴되지않고, 고립되지 않게 사랑하는 가족과 따뜻하고 적절한 관계를 하면서, 나의 진정한 바램과 소망을 잘 표현하면서 여러사람들과 더불어 조율하면서 살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지만 희망을 갖는다. 수업을 들으면서 항상 그 곳에서 강의해주시는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시는 동료들로 인해서 말이다. 한 학기동안 경계선 인격을 힘들지만 꿋꿋하게 강의해 주신 김은옥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새로운 삶을 발견하도록 해준 이번 강의로 인해 2011년이 나에게는 큰 의미가 있는 한해가 되었음을 기억하면서 올해를 마감한다.




11. 자기애적 엄마 -모헙님.

내가 가장 어릴 때 기억나는 몇 개중 한 사건이 있다. 어릴 때 내 방에서 자다가 깨면 아니면 혼자서 놀고 있다 엄마를 찾으면 엄마는 컴퓨터가 있는 방에서 컴퓨터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나와 같이 있는 시간보단 그 방에서 있는 시간이 더 많았고, 항상 엄마와 같이 있는 시간은 거의 드물었다. 주말에 다른 사촌이나 친족들을 보는 시간들 이외에는 엄마는 항상 외출이셨기 때문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엄마는 그때 박사과정 논문을 쓰고 계셨고 그 일로 매우 바쁘신 상황이었다.

그리고 내가 10살 이후에 기억나는 모습은 히스테리로 가득 찬 모습이다. 우리 엄마는 무언가에 화가 나면 집안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지르고, 신경질을 내면서 나와 내 여동생의 무언가 잘못한 점을 찾아내기 바빴다. 나와 내 여동생은 서로가 자기에게만은 걸리지 않도록 빌었고, 엄마가 화가 났을 때는 각자 방에 들어가 숨소리 조차 내지 못하고 조용히 방밖에 상황을 지켜 봤다. 나에게는 그 시간이 가장 공포스러운 시간이었다.

때론 내가 어떤 이유로 벌받는지 조차 잘 알지 못했다. 왜 엄마가 화를 내는지도 잘 몰랐다. 그렇지만 엄마가 화를 내는 이유는 다양했다. 일찍 잠들었거나, 엄마가 불렀는데 대답하지 않았거나, 인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거나, 우유를 엎질렀거나, 먹은 그릇을 제대로 치우지 않았을 때, 옷가지가 널브러져 있을 때였다.

엄마의 컨디션에 따라 모든지 좌우되었다. 때에 따라 나는 엄마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아이가 되기도 하고, 세상에서 가장 미운 아이가 되기도 했다. 엄마가 화를 내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엄마를 말릴 수 없었다. 나와 내 동생은 각자 자기 방에 들어가 숨고 아빠는 엄마와 이야기 하시다 밖으로 나가셨다. 우리는 단지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나라는 존재는 애매한 시기에 어떻게 보면 엄마의 인생 경로를 바꿔 놓았다. 엄마는 결혼을 하시고 아빠와 같이 미국으로 유학을 가기로 서로 이야기를 한 상태였다. 현실적으로 할아버지의 금전적 도움이 필요했으나 할아버지는 거절하셨고 그렇게 있을 때 내가 생겨 엄마는 미국으로 가는 계획이 무산 되었다.

내 기억에 우리 엄마는 항상 바쁜 사람이었고, 화가 나 있었으며 누군가에게 혹은 나에게 가족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어린 나에게는 엄마는 너무도 커다란 산 이었고 예측 불가능했으며, 내가 필요 없다면 언제든지 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이 되려고 했다. 엄마에게 항상 간드러진 목소리로 통화하고 엄마가 싫어할 만한 일들은 모두 하지 않았다. 엄마가 집에 도착하면 엄마가 좋아하는 커피를 타고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하고, 설걷이를 하고, 엄마 옆에서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고, 때론 엄마가 자기 전 춥지 않도록 하려고 물 주머니에 따뜻한 물을 담아 침대 안에 넣어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는 저녁 10시 이후에 집에 들어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고, 그런 상황도 만들지 않았으며 크리스마스 이브 혹은 해의 마지막 날은 항상 가족과 같이 있는 날로 알았다. 남자 친구를 사귀어도 엄마가 싫어할까 봐, 엄마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봐, 이야기 조차 해보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가장 사랑했었던 사람을 보여줬을 때 엄마의 그 표정이란…… 결국 그와 나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나는 결국 그와 헤어졌다. 내 마음속에는 언제나 버림받을까 봐 두려워하는 그래서 착하게 보이고 싶은 아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년 같은 경우 나는 1년 12달 중 6개월을 유럽에 있었다. 엄마 대신에 내 남동생을 보살펴 주기 위해 간 것 이었다. 나는 거기서 아침에 남동생을 깨우고, 아침을 먹이고, 청소 빨래를 하고, 학교에 데려다 주고 오며, 남동생의 숙제 및 공부를 확인했었다. 나는 그때 그 일이 엄마와 아빠에게 필요한 사람이라고 인정 받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기쁘게 받아 들였다.


나는 아직도 엄마에게서 벗어나는 게 힘들다. 엄마가 화를 내고 신경질을 낼까 봐 두렵다. 내가 쓸모가 없어지면 어떻게 할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먼저 공포가 눈앞에 닥쳐 온다. 내 인생을 보면 나는 대부분을 엄마에게 엄마가 기분 나쁘지 않게 하려고 화를 내는걸 피하려고만 해왔다. 나는 그것에만 집중하여 내가 가장 원하고 진실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조차 잘 모른다. 공부도, 일도 연애도 취미도 어느 것 하나 나에게 흥미를 유발하는 것은 없었다. 사는 것 조차 나에게는 버겁고 힘들었다. 만약 나에게 기운이 조금 더 있었다면 자살에 성공했을 거다. 내 기억은 단편적이다. 기억나지 않은 일들이 너무나 많다. 기억은 마치 2~3년간 중간 중간에 끊겨서 이어져 가는 느낌이다. 심지어 구멍 난 기억들도 내가 구멍이 있는지 조차 잘 모른다.

다행스럽게도 상담과 이론 공부로 인해 나의 어떤 부분이 부족하고, 어디가 현실에서 벗어나 있는지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많은 부분들이 헷갈렸고, 아직도 어느 것이 맞는지 많이는 모르겠지만 이제는 조금씩 내 안의 어떤 구조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아직 가야 할 길도 멀어 보이지만 천천히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지, 어떻게 생각을 하는지 유심히 살펴볼 예정이다. 그리고 나에게 맞는 일을 찾아 가고 싶다. 엄마와의 품 안에서 벗어나 나만의 꿈을 찾으려고 탐색 중이다. 느리지만 천천히 찾아가 보려고 한다.





12. 융합 -분별님.

이별과 상실이라는 주제의 과제를 받고 어리둥절해 할 만큼 무슨 말인지 와닿지 않았다. 이 단어들이 그렇게까지 낯설게 느껴진 이유는 발달과정에서 필요한 '분리'를 진정으로 해본 적이 없어서이겠지...

수업이 나를 바로보고, 진짜 나를 찾는 길이라 믿어서 열심히 들으려고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날 위해 뭔가를 해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분명히 내 얘기같은데 수업을 들을수록 가슴과 머리가 멍해지면서 뭐가 뭔지 알수가 없었다.

미러링 수업을 들을 때 친정엄마에게서 받은 공허한 느낌이 기억나 가슴이 아팠고,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아이들에게도 똑같은 공허한 미러링밖에 주지 못했을 거라는 자책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난 행복하고 다복하게 어린시절을 보냈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수업을 들으면서 가족들의 관심밖에서 조용하고 말 잘듣는 내모습이 기억이 났다.

늘 언니를 부러워하면서... 사실 언니는 관심과 사랑을 받기도 했지만 엄마의 감정이 폭발하면 그 보복의 대상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보복당하지 않고 사랑받고싶어 숨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말 잘듣는 아이로 컸다. '거짓자기' 그건 정말 나의 대명사같이 느껴진다. 친정엄마, 아이들, 또 내 옆에 있는 사람 그 누구든 그들이 원하는 것에 나를 맞출때는 차라리 마음이 편하고 꽤 괜찮은 사람으로 느껴지고, 반대로 내가 원하는 것을 하고 싶을땐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으로 느껴져 죄책감까지 느낄 정도이다. 난 착하고 좋은 사람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엄마보다 더 좋은 엄마가 되고싶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어른이 되지 못한 내가' 했던거라곤 사랑이라고 착각한 거대한 '융합'이였다. 자존심이 강한데 비해 좌절이 많았던 어린시절을 보낸 친정엄마는 그 보상을 언니에게 받으려고 많은 관심과 노력을 들이셨고, 엄마의 좌절에 대한 분노도 어김없이 언니에게 퍼부어졌었다. 난 옆에서 부러움과 두려움 그리도 내가 아니라는 안도감을 느끼면서 숨 죽이고, 엄마 눈에 거슬리지 않게 굴려고 노력했었다.

특별히 필요로 하는 것도 없었고, 눈에 뜨이는것이 두려워 있어도 없는 듯한 사람으로 안전하게 살아왔다. 그런데 언니는 엄마에게서 탈출해서 분리됐고, 자신의 모습을 찾아 잘 살수 있었다. 그 대신 마음대로 움직일수 있는 내가 엄마의 융합대상이되었다. 대학도, 남자친구를 만나는 일도, 결혼 상대자를 정하는것도 모두 엄마의 의견이 우선이었고, 내 의견따위는 현명하지 못하고 세상을 모른는 멍청한 아이의 하소연일 뿐 이었다. 지금도 그건 변함이 없다. 엄마의 생각과 다른 가치를 이야기 하는건 말도 안되는 바보같은 일이 되었고 죄책감까지 들 정도로 엄마는 나와 융합하셨고, 난 효녀라는 타이틀 아래 그저 순종하고 내 의견 없이 살면 현명하게 사는 거라고 믿는 '거짓자기 그 자체'로 살았다.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현실과 실제 현실이 혼돈되어 정신이 없고, 또한 그 모든 혼란을 머리로는 알게 되었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너무 괴롭고 힘들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격려로 도망치고 싶은 나와 다시 한번 마주볼 용기를 얻었고, 이제 그 어린 아이를 관심있게 봐주고 쓰다듬어 위로해 주고 싶어졌다. 내 자신을 끊임없이 불쌍해만 해서는 과잉 의존된 융합과 거짓자기로 살기를 되풀이 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에 힘들어도 나를 보듬어 자랄수 있게 힘을 주고 싶어졌다. 그래서 선생님이 늘 말씀하시는 '현실인식'이라는걸 하고 싶고, 사람들과도 진정한 소통을 하며 사는 것이 어떤것인지 꼭 알고싶다. 물론 내 사랑하는 아이들과도 소통하고 든든하게 버팀목이 되줄 수 있는 어른인 보통 엄마까지도 되보고 싶다.








28 성격유형론 수업을 마치고.  부모교육반17.06.12
27 위니캇강의를 마치고...  부모교육반17.01.17
26 중간대상  부모교육반16.08.01
25 나의 자아발달  프로이드반15.12.13
24 페어베언의 '도덕적 방어'  페어베언반15.07.28
23 코헛강의를 마치고.  코헛반14.12.23
22 두번의 위니캇 강의를 마치고.  위니캇반14.08.06
21 내가 인간관계를 잘 못하는 이유  위니캇반13.12.31
20 프로이드 강의 후기  프로이드반13.07.26
19 하인즈 코헛 후기  하인즈 코헛반12.12.28
18 페어베언 강의를 마치고...  페어페언반12.07.23
17 이별과 상실(경계선 인격장애)  위니캇반 8.11.12.25
16 라푼젤을 보고나서...  위니캇반 7.11.07.17
15 4년의 상담을 마치고  자유인11.05.17
14 위니컷 수업을 마치고  위니컷반6.1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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