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드 정신분석 연구소

사이트맵


커뮤니티


한 고개를 넘었습니다.
연실
2007년 06월 28일 06:54
2132

남들은 다들 하는 일인데 저에게만큼은 끔찍하게 어렵고 못할 일이었던 걸 한 가지 드디어 해치웠습니다. ....레포트를 제출했거든요. 화요일까지였는데 수요일로 하루만 늦춰달라고 사정하고, 그것도 넘겨서 자정을 넘겨 아침이 다된 지금에야 보냈지만, 어쨌거나 완성된 숙제를 학교에 입학한지 2년만에 처음으로 낸 것이죠. 그것도 스스로 봤을 때 그다지 완벽하지는 않지만 썩 나쁘지만은 않은 완성도로요.


대학에서는 저처럼 성적이 바닥을 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저의 문제는 그닥 심각하게 보이지 않았지만, 사실 저는 똑같이 F를 받아도 무척 힘들어하다 받곤 했습니다. 적어도 약간이라도 신경을 쓴 애들은 그래도 C라도 받고, 팽팽 논 애들은 깔끔하게 F를 받는데, 저는 발표 사흘 전날부터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하고 밤을 새면서 매달려 놓고서는 당일날 아침까지 책도 제대로 다 읽지 못해서 조원들에게 말도 없이 펑크를 내고 F를 받았죠. 써야할 레포트가 있으면 2주 전부터 도서관에서 책을 왕창 빌려다 놓고 매일같이 그 책을 노려보며 읽어야만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아무것도 제출하지 않고요.


비유하자면 다리에 무거운 돌을 달고 마라톤을 하는 기분입니다. 출발신호에서 열심히 뛰어나가서 앞으로 나가는 애들도 있고, 애초에 관심없이 슬렁슬렁 걷다가 옆길로 새는 애들도 있습니다. 저는 다리에 돌을 달고 낑낑거리며 애쓰다가 결국 중간에 포기하고 애초에 아무 관심 없었던 척 중간에 새어 버리죠. 그러니까 주변 아이들은 제가 학점따위는 애초에 관심을 끄고 호방하게 인생을 즐기는 간 큰 아이라고 생각들을 합니다만, 실상은 작은 레포트도 하나 <못> 내고 발표준비도 <못>해서 이리 피하고 저리 피하다 결국 낙제를 받는 것인데요...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 그 돌이 완전히 풀린건 아니지만, 돌이 조금 가벼워졌거나 혹은 제 다리힘이 좀 더 강해졌거나 알 수는 없지만 둘 중 하나의 요인에 의해 결승선에 도달하기는 했습니다. 여태껏 보낸 학기들과 이번 학기가 다른 점은 별로 없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아무리 죽을 쑤고 형편없이 말아먹어도 끝까지 도달했느냐 안했느냐의 차이지요. 이런저런 불운으로 훌륭하게 해내진 못했지만 발표도 한번 제대로 준비해서 했고, 전공과목도 시험을 한 과목만 빼놓으면 다 쳤고.....뭐, 이번학기도 역시 F를 받은 과목이 있고(그것도 4학점짜리;), 다른 과목 성적들도 그리 훌륭한 건 아니지만...F 때문에 평점이 깎여서 학사경고가 나오지만 않는다면 비교적 성공적인 발전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듯 합니다. 학사경고가 '또' 나온다면 앞으로 학업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가 상당히 위태로워지겠지만요;


이번학기에 친해진 언니가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스물 두 살 짜리가 레포트 못써서 징징대고 있는 거 누구한테 보여주기도 뭣하고 이해받기도 어려운데(대학까지 다 와서 학습장애라니요), 이 언니는 '니가 노력을 안해서 그렇다'같은 말은 전혀 하지 않고 완전히 이해해줬거든요. 그러면서 '일단 너에게 중요한건 완성한다는 그 자체니까, 딱 네 능력의 40%만 발휘한다고 생각하고 시작부터 해라'처럼 구체적이면서 위안이 되는 이야기도 해주고, 지속적으로 격려해주고...저도 그 언니 고민을 들어주면서 위로가 되어주려고 노력하고, 아, 사람은 서로 기대고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는 간단한 걸 갑자기 깨달은 거 같아요.


저는 살아온 대부분의 시간을 저 자신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살아왔는데, 최근 들어 지속적으로 그 평가들이 조금씩 조금씩 긍정적으로 변하고 있어요. '이런 식으로 나 자신을 학대할 필요는 없다', '나 자신은 내가 종종 생각하는 것만큼 전능하지 않으며, 자주 생각하는 것보다 무능하지 않다', '그래도 나는 예전의 나보다 훨씬 나아지고 있다'....그리고 앞으로는 더 편안해지고 나아질 거라는 기대. 이번에 레포트를 기어코 제출하고야만(!)것은 그 변화와 개선의 가시적인 성과라고 할 수 있겠지요. 레포트를 거의 완성하려던 순간에 갑자기 이유없이 불안감이 몰려왔었는데, 그 갑작스런 불안감은 그야말로 성취와 완수가 실제로 다가왔다는 느낌에 대한 저항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이런 나아짐은 제가 이따금 공상했던 것처럼 누군가 내 문제를 다 받아주고 해결해주는 엄청난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도 아니고, 자주 공상했던 것처럼 제 주변의 불만스런 환경들이 한번에 획 사라졌기 때문도 아니고(사실 혼자살게 된 것이 큰 요인일수도 있지 싶지만), 갑자기 제가 제 기대치를 채우는 엄청 능력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조금씩,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모르던 것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하고, 그것을 삭혀가면서 조금씩 편안해져온 것이겠지요. 이전의 생각은 갈피가 없이 칼날을 저 자신에게 돌렸다 바깥으로 돌렸다 불안하게 치달았는데 이제는 많이 부드러워지고, 적어도 나의 생각에 나 자신이 다칠 걱정은 크게 안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쑥스럽지만, 이창재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만일 제가 처음 접한 정신분석의 지식이 사변적이고 이론적이기만 했다면 저는 흥미 이상의 감흥을 얻지 못한 채 계속 언저리만 맴돌며 지식에 대한 강박적 집착으로 공부를 해나갔을지도 모릅니다. 역시 다리에는 돌덩이를 매달고요. 정신분석에서만큼은 그 돌덩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아서 참 좋았어요. 지식이 나와 괴리된 먼 도달점이 아니라 내 속으로 뚫고 들어와 나와 싸워가면서 나를 움직이는 힘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도 중요한 경험이고요. 선생님 덕분에 올바른 길로 첫 걸음을 들어설 수 있게 되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47 부모교육 공부 먼저 관리자07.08.172385
46 꿈을 만나다~~!! 샘물07.07.252920
45 잘 읽었어요 ! 마고07.07.262084
44 40주간의 꿈분석 강의를 마치며 키튼07.07.202851
43 ^^ 연실07.07.221764
42 애착과 상실 에카쩨07.07.042256
41 한 고개를 넘었습니다. 연실07.06.282132
40 필라르의 레포트 잘 읽었다 ..나도 쓰고 있다.현재 나의 마감증후군을 마고07.07.172197
39 [문예아카데미 07 여름 6/ 27 개강]이창재의 정신분석 강의 _ 코헛 - ‘자기’의 위력! 문예아카데미07.06.142586
38 프로이드 정신분석연구소의 두 선생님께 한비07.06.072465
37 이창재 선생님 감사합니다.. 키튼07.05.152472
36 마음 이창재07.05.172635
35 사랑받고 싶었다. 버림07.04.242393
34 찬물을 확 끼얹거나 비꼬거나... 샘물07.04.182615
33 그래 맞어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데.... 키튼07.04.202139
[1] [2] [3] [4] [5] [6] [7] [8] [9] [10] [다음 10개]
    

▲ Go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