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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이야기와 문라이트
함께라면(rroye@hanmail.net) http://www.freudphil.com
2018년 06월 11일 19:17 171
● 마리이야기와 문라이트(상담스터디 함께라면)

1. 마리 이야기와 문라이트(딸기님)
영화 ““마리 이야기””와 ““문라이트”” 는 주인공 마리와 샤이론의 성장-성숙에 관한 이야기이다. 마리는 신체적 장애로 인해 자신 만의 세상에 갇혀 있어 발달이 멈춘 아이이고, 샤이론은 그가 가진 결핍된 환경에서 비롯된 정서적 문제로 인해 발달-성숙이 멈춘 주인공이다. 마리는 눈과 귀의 장애, 그에 대한 부모의 몰이해로 인하여 인간이라기 보다 야생의 짐승과 같은 상태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마리가 마가렛 수녀님을 만나고 그녀의 헌신적인 노력을 통하여 마침내 현실을 살아가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병에 걸려 누워있는 마가렛 수녀님을 위하여 스프와 물이 있는 쟁반을 들고 들어와 수녀님이 드시게 하는 장면과 수녀님의 묘소를 찾아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수녀님과 대화하는 장면은 마리의 성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엄마와는 할 수 없었던 자기대상 경험을 통하여 수녀님을 믿을만한 내적 대상으로 내면화하면서 자기가 형성되고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홀로 죽음의 공포에 직면한 수녀님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오히려 수녀님의 자기대상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나갈 수 있었고, 좋은 관계 경험을 통하여 돌아가셔도 계속 관계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문라이트””의 샤이론은 미혼모인 엄마 밑에서 자라는 외로운 아이다. 더구나 엄마는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마약까지 투여하는 등 그에게 제대로 된 양육과 사랑을 줄 수 없는 사람이다. 이러한 결핍과 왜소한 신체조건 등으로 학교에서도 왕따를 당하는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햇빛처럼 다가와 아버지처럼 돌봐준 후안은 샤이론에게 힘들 때 찾아올 수 있는 안식처를 제공하고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조언을 나누어 준다. 달빛이 비추는 바다에서 후안으로부터 수영을 배우고 그를 믿고 스스로 물에 뜨는 모습은 샤이론이 이 세상에서 다시 성장을 시작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매우 감동적이었다. 또한 결국 무엇이 될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는 후안의 조언 역시 샤이론이 이 현실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그것을 용기 있게 드러낼 수 있게 해 주는 힘이 되었던 것 같다. 결국 마약상으로 나름 입지를 갖고 사는 모습이 딱 후안을 동일시한 아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특별히 ““나””의 문제에서 마리와 샤이론을 바라볼 때, 처음 가지는 느낌은 우습게도 부러움이다. 내 인생에도 마가렛 수녀님이나 후안 같은 사람이 있었다면 지금 나는 조금은 다른 사람이 되어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과 함께 말이다. 물론 수녀님이나 후안과 같은 존재 이전에 ““나””의 첫 번째 대상인 ““엄마””로부터 충분한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다면 수녀님이나 후안과 같은 존재에 대한 갈망조차 이렇게 강렬하지는 않았을 것 같기는 하다. 나의 엄마는 그 시대에는 흔하지 않은 전문직 여성으로 매우 성취 지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다. 실제로 그녀는 외적으로 무척 성공하였고 누가 봐도 부러워할 만한 인생을 살았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나와 나의 형제들은 그럴듯한 외적 조건에도 불구하고 여러 내적 결핍으로 인하여 고통 받고 있고 현실을 살아가는 데 문제들을 일으키면서 성숙한 인간이 누리는 행복을 가지지 못한다. 나의 세상은 엄마에게 온통 저당 잡혀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묶여 있었다. 나의 인생에 내가 없고 엄마가 나 대신 내 자아가 되어 내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내가 가진 고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얼굴에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지만 돌이 막 지났을 때 마당에서 넘어져서 생긴, 꽤 큰 흉터가 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이 사건은 전적으로 엄마의 이야기로 나에게 기억되어졌다. 나는 오랫동안 이 흉터에 대해서 신경쓰지도 않았고, 흉터를 지우기 위한 그 어떤 시술에도 관심 갖지 않았다. 엄마는 이 일을 이야기할 때 ‘다친 아기’-나는 어땠는지에 대해 얘기해 본 적이 없었다. ‘아이가 얼마나 아팠을까’ 라든지 ‘얼마나 놀랐을까’라든지 하는 공감의 표현은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다만 ‘엄마 자신’만이 존재하는 이야기들, 주로 자기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는 이야기, 병원을 어떻게 데리고 갔는지, 성형외과가 아닌 일반외과에 데리고 간 아빠를 얼마나 비난했는지 등의 이야기였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내가 아니라 엄마였던 것이다. 그 이후 엄마는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상처를 잊어버렸고, 나도 그녀의 시선으로 나의 흉터를 바라보고 아무 느낌도 없이 지워버리게 되었다. 상담하는 가운데, 거의 50년이 지나서야 이 사건을 떠올리며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나의 생각, 감정까지 결정지었던 것이다. 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던지 상관없이, 장애의 세계에 갇힌 마리처럼, 엄마의 돌봄도 받지 못한 채 고립되어 자신 만의 세상에 갇혀있던 샤이론처럼 나는 엄마가 만들어 놓은 세상에 갇혀 사는 것 만 허용 받고 그 안에서 만 생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현실감각, 특히나 심리적인 현실성은 오랜 기간의 발달과 경험을 거쳐 개발되며, 발달 상의 장애는 현실감각을 손상하고 왜곡시킨다고 하는데 나는 엄마의 세상에서 이런 능력이 필요하지도 않았고, 발달시킬 수도 없었던 것 같다. 때문에 많은 인간관계에서 어려움을 겪었고 왜곡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말도 안 되는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면서 너무나 오랜 세월 미성숙하게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양육하는 과정에서 엄마와 똑같은 잘못을 저질렀던 나를 인정하는 것은 죽기보다 힘들었고, 나 때문에 상처받고 내 세상에 갇혀있는 나의 아이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것은 더 큰 고통을 불러일으킨다. 이 스터디를 통하여 멈추었던 성장을 다시 시작하고 성숙한 성인이 되도록 노력하며 다른 멤버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기를 소망해 본다.


2. 마리이야기(레몬님)
영화 ‘마리 이야기’를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던 것은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소녀 마리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생애를 바쳐 돕는 수녀님과의 관계를 보면서 내가 부모교육 수업과 상담을 통해 나의 유년기 상처들을 치유하면서 사람들과 어울려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 닮아 있어서였다. 마리가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어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 아무하고도 소통할 수 없는 상태는 불안과 혼란스러움 그리고 외부세계와 접촉능력이 전혀 없는 엄마의 정신세계에 갇혀 옴짝달싹 할 수 없이 마비되어 느끼지도 못하고 표현하지도 못하는 내 모습과 같다.

거절당함의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커서 나의 real want 를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할 뿐 아니라 나는 내 자신이 외부세계와 연결되어 무슨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갑자기 몸이 돌덩이처럼 무거워지고 에너지가 전부다 고갈되어 힘을 쓸 수 없을 것 같이 느껴진다. 실제로 바닥이 다 갈라져버린 사막 같은 곳에 햇볕은 뜨겁게 내리쬐는데 양동이엔 물이 다 떨어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모습이 상상이 되고 연료가 다 떨어져 버려 쓸 수가 없는 상상이 마구 떠오른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을 못할 것만 같다. 그런데 너무 신기한건 막상 그 일을 시작하거나 끝내놓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멀쩡해진다.

이런 순간을 경험 할 때마다 성경에 나오는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광인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거라사 지방의 광인은 무덤사이에 거처하였고 쇠사슬과 고랑을 끊어버릴 만큼 힘이 세 아무도 제어할 수 없었고 밤낮 무덤사이에서나 산에서 소리를 지르며 돌로 제 몸을 상하게 하는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을 만나 치유함을 받고 온전하여진 내용의 이야기다. 자기도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원하지 않는데 자기를 파괴하며 짐승처럼 살고 있는 모습, 치유함을 받고 정신이 온전하여진 이 모습이 내가 겪는 이런 경험과 유사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공부와 상담을 하기 전엔 알 수 없이 작동하는 힘에 눌려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그런 순간을 맞서며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밀어내지 않고 해내고 있다. 거라사 광인의 기적을 지금 현실에서도 체험하며 살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나의 독서 센터를 오픈 한 초기는 좀 힘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자리를 잡아 안정적이 되었고 적절한 수입도 들어와서 걱정할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변하지 않고 아직도 여전히 초기에 오픈 할 때 마음처럼 위태로움이 느껴지고 불안하다. 무엇이든 잘 안될 거 같고 곧 망해버릴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고 내 통장에 돈이 조금씩 쌓이고 있지만 남편에게 나 돈이 하나도 없으니까 생활비 내 통장으로 넣어줘야 한다고 얘기한다.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살고 있고 내 삶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을 살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온전히 내 것으로 느껴지지 않아서 슬플 때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무엇이든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경험들이 계속해서 쌓이고 있다는 것이다. 마리가 변화되는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처럼 나의 성장을 위한 과정도 결코 쉽지 않았다. 마리에게 헌신적인 마가렛수녀님이 계셨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처럼 내 삶에도 중요한 대상이 있었기 때문에 내 경험의 한계를 뛰어 넘어 삶의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렇지 못했다면 살던 삶을 반복하면서 고통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내 앞으로의 삶에 좋은 일이 자꾸 생길 것 같은 기대와 설렘이 있다. 새롭게 발견해 가는 내 모습을 만나는 것도 기쁜 일이다. 성숙을 향해가는 길에 좋은 가족들이 생겨 기쁘고 맘이 든든하다. 귀한 모임에 초대되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해보고 싶다.


3. 이런 말이 떠오른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내 팔자가 그렇지 뭐……..’(리치님)
팔자라는 거 그건 아마도 굴레를 말하는 거 같다. 세상에는 정해진 팔자가 없다. 단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굴레 안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나올 수 없는 신세를 한탄하는 것, 그것이 우리를 긴 한숨을 쉬게 하고 너무 힘들어 포기하고 싶게 하는 게 아닐까. 두 영화를 소개하려고 한다. ‘마리 이야기, 손끝의 기적’과 ‘문라이트(Moonlight)’. 첫 번째 영화 ‘마리이야기’의 주인공 마리는 세상과 단절된 장애아로 현실과 전혀 접촉 할 수 없는 소녀이다.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이 자기만의 세상에 갇힌 불쌍한 이 소녀는 어느 누구에게도 맘을 열지 않는다. 인격을 갖춘 인간이라기보다는 야생 동물과 같은 끔찍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녀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있도록, 접촉 할 수 있도록 목숨을 바쳐 돕기로 결심한 수녀 마가렛을 만나게 된다. 마가렛 수녀님은 마리가 자신만의 세상에서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헌신하는데, 마침내 이 둘은 전쟁과도 같은 힘든 과정을 겪으며 조금씩 변해간다.

영화는 실제 19세기 말 프랑스의 푸아티에 지방에 있는 라네이 수도원에 있었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세상과 소통 할 수 없고, 현실과 접촉 할 수 없는 마리가 비로소 자기만의 세상 덫에서 벗어나 마가렛 수녀님과 진정하고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은 영화 제목에서 보듯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하지만, 평소 건강이 좋지 않던 마가렛 수녀님은 죽음을 앞두게 되고 이 둘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건강한 이별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영화에서 아직도 나를 가슴 저리게 만드는 장면이 있다. 멈출 수 없는 눈물을 흘리며 가슴을 부여잡게 만든 장면, 그것은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공포에 휩싸인 수녀님에게 손을 잡으며 아름답게 웃는 마리의 얼굴을 보는 그림이다. 야생의 짐승과 같던 마리가 그토록 온화하고, 편안하게 미소 짓는 모습은 너무나 아름다워 반짝거리는 햇살이 비추는 듯 했다. 마리는 수녀님에게 따뜻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작별을 선물했고, 결국 그 둘은 서로에게 깊은 마음을 나눌 수 있는 진정한 관계를 맺는 아름다움을 내 안에 각인 시켜주었다. 내가 이제껏 가져 볼 수 없었던 ‘관계’라는 진정성을 잊을 수 없게 가슴속 깊이 새기게 보여주고 만들어주었다. 가을학기에 하인즈 코헛 강의를 듣게 되었다. 코헛은 우리 모두 죽는 날까지 자기대상 관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하였다. 마리에게 수녀님이 신뢰할 수 있는 대상으로 정신에 자리 잡기까지 튼튼한 자기대상역할을 해주었기에, 죽음을 앞두고 모든 자신의 한계를 내려놓고 인간적 나약함으로 신을 의지하면서도 두려움에 떠는 수녀님에게 마리가 다시 튼튼한 자기대상이 되어 수녀님으로 하여금 평온하게 죽음을 마주하게 도왔던 것이다. 인간끼리도 또 인간을 통해 신의 사랑을 느끼는 이게 구원이 아닐까. 우리는 지금 이 상태를 대상 신뢰, 친밀감, 안정감, 만족감, 행복감으로 표현해볼 수 있겠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에 참 이상한 감정들이 일어났다. 슬프면서도 희망적이고, 희망적이지만 다시 슬퍼지고... 타인과 관계가 힘든 나로서는 상대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신뢰하고, 거기서 안정감을 느끼고, 다시 행복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전혀 경험해 본 적이 없기에 영화 안의 마리와 수녀님이 서로에게 주고받는 자기대상에 따뜻하고 부러우면서도, 다시 질투를 느끼게 되고, 조금 더 지나면 나만 가지지 못함에 대한 억울함이 격노를 일으켜 슬퍼지고 우울하게 되는 것이다. 친구, 배우자와 자식, 부모님 그리고 먼 타인들에게 자동적으로 적절한 거리가 생겨나거나 경계가 서지 않아 아무에게나 받아보지 못한 엄마의 사랑을 함부로 요구하거나 갈망하는 위험하고 성숙하지 못한 나만의 자기중심성이 내 얼굴을 빨개지게 만들고, 나도 정말 튼튼하게 신뢰할 수 있는 대상관계를 해보고 싶다는 소원을 가져보게 하는 영화가 바로 마리이야기, 손끝의 기적 이였다. 나에게도 기적이 일어나기를 몹시 열망하게 만드는.

또 다른 영화 문라이트 Moonlight.
영화를 보는 내내 얼마나 멈췄었는지 모른다. 영화를 다 본 후에는 사실 알 수 없는 공포를 느꼈고, 영락없이 이 공포는 내 꿈에 반영되었다. 나를 휩쓴 공포는 과연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내가 벗어낼 수 없는 삶의 굴레에 대한 절망감의 공포일 것이라 여겨진다. 나와 엄마 사이 밖 관계를 벗어나 나를 찾을 수 없는 굴레에 대한 힘듦의 공포……… 자기가 경험한 것에 대한 울타리 밖의 체험을 하지 않고서 새로운 자기를 찾기 란 얼마나 어려운가. 샤이론은 가난하고 아버지 없이 마약 중독자이며 집에서 매춘 일을 하는 엄마에게 길러졌다. 하지만, 마약과 폭력의 흑인 사회 환경에서도 왕따이고, 의지할 곳 없이 외롭게 방치되어 살아간다. 인간적으로 자연스럽게 느껴야 하는 친밀감이나 우정이 성자극과 겹쳐서 사랑과 성이 뒤엉켜져 자신이 경험한 사춘기 경험을 결국 못 벗어난다.

사실 스토리의 전개가 드라마틱하게 극적인 영화는 아니다. 하지만 장면 하나하나가 가슴에 콕콕 박히며 머리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미지의 영화이다. 영화 끝에는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묘한 공포에 사로 잡혀 있는 나를 꺼내야 했으며, 꿈속에서는 다시 나를 찾으려는 여행을 떠나야만 했다. 사람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환경의 울타리 안에서만 체험할 수 있는 경험을 박차고 세상 밖의 현실에 접촉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사실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 같다. 더욱이 양육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면, 잠재능력이 있다 해도 가능성의 퍼센트는 제로라고 생각된다. 노력으로 될 수 없는 현실이 바로 우리가 가진 굴레인 것 같다. 생물학적 유전자 때문이 아니어도 길러진 양육 환경은 영락없이 우리를 지배한다. 그 덫은 나오기 힘든 멀고 긴 터널 안과 같은데, 그 터널 끝의 빛을 보기란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든다. 이것이 바로 내가 느낀 공포인 것 같다.

나는 편집증 엄마에게 양육되었는데, 현실이라는 것을 모르는 채 모호한 상태로 나만의 세계에 갇혀 살았다. 눈이 있어 볼 수 있고, 귀가 있어 들을 수 있어도 세상과 타인에게 접촉 할 수 없었으니 장애아인 마리와 다를 것이 없었다. 무엇이 현실인지 알 수 없었고, 타인을 모르는 채 자기 중심성에 빠져 있었으니 나만의 굴레 안에서 아무리 노력을 해도 나의 주체를 가지기 어려웠고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다. 나이가 들어서도 성숙하지 못한 채 어릴 적 충분히(마땅히) 받아야 할 무조건적 사랑을 아무에게나 바라고 기대야만 했다.


정서생활의 기초가 되는 사랑을 주고받는 것, 일하고, 놀고 쉬는 것은 무지 쉬워 보인다. 하지만 이 성숙을 이끄는 표준적인 능력들이 채워지지 않으면 정서적 혼란으로 인한 불안감, 분노를 조절하는 적절한 의존을 할 수 없이 사회성 발달에 장애가 될 수밖에 없는 슬픈 일이 일어난다. 사실 나는 다른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충족되었어야 하는 엄마라는 인격으로부터 진정한 사랑 받은 경험이 없다. 따라서 나 스스로를 관리 할 수 있는 능력이나 타인과 적절한 관계를 맺으며 적절한 의존을 조절 할 수 없어 늘 불안하고 외로운 삶을 살아야 했다. 나이가 들며 당연히 발달해야 하는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은 까닭에 현실감 없는 불안정한 일상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해야 했다. 예전에 입에 달고 살던 말 ‘아이고 내 팔자야……’ ‘내 팔자가 그렇지 뭐……’ . 절대로 벗어 낼 수 없었던 팔자는 바로 내 굴레였던 것이다. 끊임없는 현실 접촉의 도전은 번번이 무너져 나를 절망에 빠뜨리고, 격노하게 만들었었다. 아무리 해도 해도 안 바뀌는 내 팔자 탓을 하며.

유아적 성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발달이 멈춰 성숙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하는 내가 절대적으로 원하는 것이 있다. 버티기, 견뎌내기, 담아내기, 기다리기이다. 이 네 가지를 하지 못해 아주 많은 관계를 파괴적으로 만들었었다. 물론 타인을 공감하고, 진정으로 이해하는 능력이 핵심적이겠지만, 아주 기본적인 내 주체가 없기 때문에 이 발달 단계까지는 많은 시간과 죽을 것 같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그전에 이 네 가지를 꼭 이루고 싶다. 아직도 나에겐 진실한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거대한 파괴 역동이 작동해 시작도 전에 끊어 버리는 것이 쉽고 편하기 때문이다. 지금 이순간도 남들은 자동적으로 당연하게 일어나는 사소한 기다림이나, 자신을 담아내고 보는 일이 쉽겠지만, 나는 죽을힘을 다해 끝까지 사수하듯이 고통을 견뎌야한다. 정말 억울하고, 차라리 쉽게 무너지고 싶지만, 나와 함께 할 수 있는 소중한 인연을 지켜내 관계 가치를 높이는 귀중한 일을 하고 싶다. 내 뜻이 이뤄 질 수 있도록 함께 있어주는 소중한 그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끝까지 버텨 우리만의 진정한 관계를 반드시 경험할 것이다.


◆ 몬스터 콜과 마담프루스트의 비밀의 정원(함께라면 상담스터디)

1. 몬스터 콜과 마담프루스트의 비밀의 정원(포도님)
예전에 가끔 나도 모르는 새에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 깜짝 놀라곤 했었다. 그 대화 상대는 대부분 엄마였다. 때로는 화를 내며 항의하기도 하고, 변명을 하기도 하고, 억울하니 알아달라고 하소연 하고 있기도 했다. 그 내용이나 형식을 모두 떠나서 이제 깨닫는 것은 강력한 힘으로 나를 짓누르던 엄마가 얼마나 내 무의식에 깊이 박혀있나 하는 점이다. 현실에서의 엄마는 이미 80이 넘으셔서 나이 든 안쓰러움과 연약함을 보여주지만 내 무의식에 살아있는 엄마는 여전히 어린 나를 마음 아프게 하고 억울하게 했던 괴물 같은 이미지이다. 아직도 분리개별화의 문제를 껴안고 있는 나는 나와 엄마의 문제를 들여다보느라 지쳐서 아이들 문제를 들여다 볼 엄두도 못 내고 있기도 하다. 영화 몬스터 콜이나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내 무의식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고 그 진실을 표현해 냄으로써 진정한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다면 나도 나의 아이들도 조금은 자유로워지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영화 몬스터 콜의 주인공 코너는 암에 걸려 시한부 삶을 살아가는 엄마와 단둘이 살아가는 소년이다.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엄마를 바라보는 소년은 그것이 못 견디게 고통스러웠지만 자신의 고통을 억압하고 스스로를 챙기고 돌보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의 이런 고통을 끝내고 싶은 무의식적 소망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코너의 꿈을 통해 잘 나타난다. 코너는 교회 공동묘지에서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땅이 갈라지고 교회가 무너질 때 갈라진 땅 사이로 빠진 엄마를 구하기 위해 손을 뻗어 엄마의 손을 잡고 있는 꿈을 꾼다. 하지만 손을 잡고 있기가 너무 힘들고 무서운 그 순간 항상 꿈에서 깨어난다. 이 고통을 끝내기 위해 스스로 엄마의 손을 먼저 놓아버렸다는 진실을 알기 두려웠던 코너는 무의식적인 죄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자신은 벌 받아야 하는 사람이라는 마음을 학교 친구에게 투사하여 자신을 그 친구의 폭력 속으로 던져 버린다. 그리고 그 폭력을 견딤으로써 자신이 충분히 벌 받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코너에게 어느 날 12시 7분이면 찾아오는 주목나무 몬스터는 코너에게 자신의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준다. 세상에는 거짓 같은 진실이 많고 완벽하게 선한 사람도 또 악한 사람도 없으며, 대부분의 사람은 그 중간 어딘 가에 있다는 현실을 가르쳐 주고 코너의 죄책감을 덜어주며 진실을 말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 결과 아빠나 엄마로부터 의존의 욕구를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돌보는 어른스러움으로 무장하고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할머니에게 모두 쏟아 부었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엄마를 바라보면서 느끼는 자신의 고통을 끝내고 싶어 하는 마음 즉, 엄마가 빨리 죽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죄책감과 동시에 ‘엄마가 떠나지 않으면 좋겠다는 어린아이다운 소망을 가지고 있었음을 솔직하게 드러냄으로써 현실에서 엄마의 손을 놓지 않으면서도 마침내 진정으로 엄마를 떠나보낼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코너에게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코너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도 평생을 엄마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엄마의 죽음과 자신이 느꼈던 여러 고통들을 직면하지 못하고 애도하지 못하여 영원히 고통스러웠던 과거에 사로잡혀있지는 않았을까?

나는 오빠, 여동생 사이에 낀 둘째이자 큰딸이기도 하다. 이위치는 엄마와 내가 원하는 것들 간에 큰 간극을 만드는 단초가 되었다. 나의 엄마는 악성 자기애자여서 아빠를 포함하여 가족 모두를 그녀가 생각하고 그려나가는 완벽한 인생 스토리 속 등장인물들처럼 다루었다. 그 이야기 가운데 그녀로부터 부여 받은 각자의 역할들이 있었고 얼마나 그 역할을 잘 수행하느냐에 따라 그녀의 칭찬이나 사랑 여부가 결정되어졌다(사실 그녀를 완벽하게 만족시킨 사람이 없는 것 같아서 누가 진실 된 사랑을 받았을까 싶지만). 그 안에서 나의 역할은 엄마를 언제든지 이해하고 도와주고 오빠와 동생에게 뭐든지 양보해서 집안이 시끄럽지 않게 해야 하고 엄마가 없을 때는 가족 모두를 돌보는 이른바 살림밑천 큰 딸이었고, 내 스스로 나는 그저 그냥 있는 그대로 나를 사랑해주고 나도 내 것을 챙겨도 혼나지 않기를 바라는 두 형제 사이에 낀 박탈감 많은 둘째일 뿐 이어서 충족되지 않은 것들로 언제나 허덕였다.

자라면서 집안은 경제적으로 여유 있었고 사회적으로 존경 받는 부모를 가지고 있었으며, 남들에게 좋은 집안 딸 같은 인상을 주어 부러움을 받았지만 내 내면은 마치 공장에서 가발을 만들어 집안을 돕고 오빠, 남동생의 학비를 대던 70년대의 그 큰딸 같은 자아상을 가지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이런 엄마에게 의존할 수 없었고 오히려 엄마의 의존의 대상이 되어 적절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의존의 욕구가 해결되지 못했다는 것은 내 상처와 불안의 출발이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강박적 행위의 원인이 되었다. 더 나아가서 엄마의 완벽한 그 그림 속에서 나의 오빠는 모든 것이 완벽하게 성공적 이여야 했기 때문에 오빠와는 달랐던 나의 개성이나 자질들은 오빠의 것보다 열등하고 나쁜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세뇌를 받았다.

실제로 나는 오빠가 대학을 갈 때까지 오빠가 나보다 공부를 못하고 있었다고는 생각도 못했었다. 그에게는 엄마의 전폭적인 지지와 기대가 있었고 나는 감히 가지지 못했던 훌륭한 자질들과 좋은 머리가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무엇을 가졌든 그것과는 상관없이 늘 자신 없고 사람들이 나의 본 모습을 알까 봐 전전 긍긍하고 내가 뭔가 사람들을 속이고 있는 것 같은 죄책감도 들고 사람들의 눈치만 보면서 진정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나를 만든 원인들이었던 것 같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나는 결혼을 하여 첫째로 아들을, 둘째로 딸을 얻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너무 많은 혼란과 고통 속에 있었다. 받아보지 못한 사랑을 주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그 전까지는 내 내면과 상관없이 겉으로 보여 지는 조건들로 어떻게든 살아졌지만 아이를 키우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엄마 같은 엄마는 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하던 공부와 일을 모두 그만두고 좋은 엄마가 되는 것이 지상 과제인 것처럼 생각했었지만 자아상이 튼튼하지 못했던 나는 엄마의 자아와 나의 자아가 마구 섞인 상태에서 아이들을 키운 것 같다. 또 해결되지 못한 결핍으로부터 나를 강박적으로 방어했던 나는 아이들의 감정을 읽어 충분히 공감을 해주지도 못했고 아이들이 그 나이 때면 할 수 있는 실수를 너그럽게 보아 넘기는 대신에 내가 완벽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강박적으로 행동했다. 엄마로부터 자연스럽게 체득한 게 없었기 때문에 너무나도 열심히 육아서를 읽어 단어카드 만들듯이 내용을 요약 정리하여 붙여놓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그 일들을 수행하기 위해 애썼다.

책에서 아이들이 고집이 세져서 혼자 밥을 먹고 싶어 하는 시기가 오면 아이가 혼자 먹을 수 있게 도와주어야 한다는 구절을 읽고는 자유롭게 흘리도록 아기의자 밑에 넓게 비닐을 깔아놓고 밥을 차려주지만 몇 숟가락도 먹기 전에, 한 두 개씩 비닐에 음식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저걸 또 어떻게 치워야 하나 하는 생각과 완벽한 나의 상태가 무너지는 것 같은 불안감에 갑자기 숟가락을 뺏어서 먹여주고 있었던 내가 생각난다. 겉으로 그 나이에 맞는 독립을 허락하는 좋은 엄마 같지만 사실은 독립의 맛도 보기 전에 다시 아이를 무기력한 아기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비슷한 일이 있을 때마다 아이가 느꼈을 혼돈과 좌절, 분노 같은 감정들이 하나도 와 닿지 않았다. 나의 아들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엄마의 감정적인 배려를 받아보지 못한 채 엄마의 세상에 갇히게 된 것 같다. 스스로 무언가를 해결해 보려는 의지는 엄마에게 박탈당하고 끊임없이 엄마의 눈치 만 보는 걸로 자신의 에너지는 다 써버리고 세상으로 나갈 힘이 남아있지 않은 무기력한 어른아이가 되고 있는 것 같아 몹시도 마음이 아프다.

더구나 엄마의 나에 대한 메시지는 분명했던 데 반해 나는 나의 상처 때문에 아들에게 서로 모순된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나는 둘째로 나를 닮았다고 생각한 딸을 키우면서 점점 더 엄마를 이해할 수 없었고 내가 엄마와 오빠에 대해 가졌던 미움을 아들에게 투사하여 괴롭혔다. 그 아이의 특성이나 감정은 나에게는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알아챌 수도 없었다. 나의 성취감과 평가를 위해, 또 엄마보다 내가 더 좋은 엄마라는 확인을 위해 아이의 성공을 채찍질 했지만 사실 나는 엄마가 그토록 인정해 주지 않던 나와 같은 자질을 타고 난 딸아이의 성공이 나의 성공인 것 같아 그것을 더 간절히 원하고 아들의 실패를 바라는 무의식적 소망이 있었음을 가슴 아프게 인정한다. 이런 마음을 감추기 위해 겉으로는 더 열심히 아들아이를 뒷바라지 하였던 것 같다. 겉으로는 잘 하라고 전폭적으로 도와주지만 무의식적인 메시지는 넌 잘 하면 안 된다고, 잘 될 수가 없다고 아이에게 말하고 있었으니 아이가 느꼈을 혼돈과 상처와 분노를 이제 와서는 상상도 할 수가 없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의 주인공 폴을 보면서 마치 나의 아들을 보는 것 같았다. 폴은 아기 때 부모를 잃고 이모 두 분과 함께 사는 피아니스트이다. 아기 때의 충격으로 기억과 말을 잃어버린 채 이모들의 과잉보호로 만들어진 안전한 세상에서 감정 없이 기계적으로 살아간다. 이모들의 꿈인 피아노 콩쿠르에 해마다 나가 상을 받는 것만이 삶의 목적이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우연히 마담 프루스트의 정원으로 들어가 그녀를 만나고 그녀의 차를 마시며 자신의 무의식을 탐험하게 되면서 그 안전한 세상을 깨고 그녀의 충고대로 비로소 현실에서 자신 만의 인생을 살게 된다. 그의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폴은 아빠가 엄마를 죽인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사실은 아빠, 엄마의 죽음이 이모들의 그랜드 피아노가 천장을 뚫고 떨어지는 사고로 인한 것임을 기억해 냄으로써 마비된 자신의 세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모들은 자신의 피아노 때문에 폴의 부모님이 죽었다는 죄책감 때문에 폴을 자기들이 생각하는 안전한 세상에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지원해 주었고 그 안에서 폴은 자신이 아닌 채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 마치 내가 아들의 실패를 소망한 죄책감 때문에, 내가 좋은 엄마임을 더 증명하기 위해 과잉 보상적으로 아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부으며 더 나은 결과물을 만들어 내라고 아들에게 집착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폴이 해마다 대상을 받게 하기 위해 콩쿠르에 내보내는 이모들처럼 말이다. 끊임없이 아들을 다른 집 아이들과 비교하고, 내 스스로도 다른 엄마들과 비교하고 경쟁하여 상처받고, 지나치게 적대적인 시기심으로 오히려 그들이 나보다 더 가진 것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오른다. 그 결과 감당할 수 없는 불안과 죄책감이 몰려오면 아들을 더 채찍질 하는 동시에 한 번에 모든 것을 포기 하고 싶고 보호받고 싶은, 누군가 이 모든 것을 대신해 주었으면 하는 퇴행욕구가 일어나 며칠씩 밖에도 나갈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한 상태로 집에 스스로를 가두기도 하였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그 안에서 아들은 자신의 것이 아니 인생을 남이 조정하는 롤러코스트에 올라 탄 것처럼 정신없이 흔들리고 불안해하며자기발달의 기회를 놓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의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독립을 갈구하고 있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한 아들에게 공부를 계속 하라고 충고해 보지만 진정한 독립은 경제적 독립이라며 얼른 졸업하고 돈을 벌 수 있는 로스쿨에 진학하겠다고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아이에게 또 전심전력으로 쏟아 부을 것을 찾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한걸음 물러서서 아들을 지지하는 방법은 나의 결핍을 충분히 애도하여 엄마로부터 분리개별화를 성취하고 아들의 결핍 또한 충분히 애도하여 그 아이를 독립시킬 수 있게 하는 것 일 텐데 무척이나 어렵게 느껴진다. 또 한편으로는 나의 아들 역시 내면으로부터의 몬스터 콜을 경험하고 마담 프루스트와 같은 지지자를 만나는 기회를 꿈꾸어 본다. 코너처럼. 폴처럼.


2. 마담 푸르스트의 비밀 정원(키위님)
폴은 아주 어릴 적 부모님을 잃고 쌍둥이 이모에 의해서 키워진다. 이모들이 운영하는 댄스 교습소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하루하루 살아가는 폴의 모습은 마치 로봇 같아 보였다. 어린 아이처럼 과잉보호를 받는 것과 달리 무표정한 얼굴과 생명력 없는 눈은 자신의 삶에 대한 아무런 의지가 없는 사람 같아 보였다. 우연히 마담 프루스트를 만나면서 웃음을 되찾고 스스로조차 기억하지 못했던 과거를 기억 낚시를 통해서 다시 만나며 아버지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과 그에 얽힌 오해를 풀어 간다. 또한 이모들로부터 독립하여 자신의 삶을 살아 갈 수 있게 되는 과정이 꼭 나와 같아 너무 놀랐다. 영화를 보면서 폴이 잘 공감이 되었던 것은 나도 부모교육 수업과 상담을 통해서 아버지와의 관계를 새롭게 할 수 있었던 계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서 많은 증오와 혐오를 가지고 있었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 쳐지게 싫은 마음이 컸었다. 엄마는 늘 아버지에 대해서 느끼는 좋지 않은 감정이나 생각을 어린 자식들 앞에서 거르지 않고 표현하셨다. 외갓집 식구들도 어쩌다 우리 집에 오면 엄마니까 참고 살아간다고 그래서 불쌍하다고 하셨다. 부부싸움이 있을 때 아버지는 종종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에 맞고 있는 엄마를 볼 때 마다 아버지가 나쁘고 몹쓸 사람임을 확신했었다. 성인이 되자 엄마는 아버지하고 무슨 일이 생기기만하면 나에게 달려와 하소연을 했고 난 엄마보다 더 분노하면서 아버지를 몹쓸 사람으로 치부 했다. 나한테 아빠에 대한 미움을 한껏 쏟아놓은 엄마는 마음이 가라앉아서 집으로 돌아갔지만 나는 아버지를 향한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서 ‘어쩜 인간이 그 모양일까?” 하며 내내 곱씹곤 했다.

신문이나 뉴스에서 여자를 괴롭히는 남자들에 대한 기사를 보면 내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자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많이 느꼈다. 아버지 같은 사람을 만날까봐 두려웠고 아버지가 죽으면 장례식도 안 갈 거라고 했을 정도로 미워하고 싫어했다. 코헛 수업을 듣던 중에 나에게 아버지 자리가 없음을 발견하고 크게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40년이 넘는 세월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아버지와 관계를 맺어 본 적도 없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엄마 때문에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고 엄마의 눈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그게 아버지라고 생각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상담과 수업을 통해 이해가 되지 않았던 아버지에 대한 오해를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아버지와 나는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

아버지와 나는 이년 정도 잘 지냈는데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에 많은 상처를 받았었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는 동안 내가 아버지와 새롭게 관계를 맺고 아버지를 떠나보낼 수 있었다는 것이 너무 큰 위로가 되고 감사 했다. 아버지도 너무 많은 결핍을 가지신 분이라 감정조절이 어려웠고 외부세계와 접촉하지 못해 평생을 쳇바퀴 돌 듯 가게와 집을 오가며 일만 하시긴 했지만 그래도 엄마를 버리지 않고 가정을 지키셨던 것, 오랫동안 자신의 일을 꾸준히 하셨던 것, 어려운 사람들의 딱한 처지를 생각해 도움을 주셨던 따뜻한 면도 있었다는 걸 추억하게 된다. 아버지를 만날 수는 없는 슬픔이 크지만 사랑받았던 경험으로 어렵고 힘들 때나 일하기 싫어질 때 아버지를 불러 얘기하는 게 나름 힘이 될 때가 있어 행복하다.

키위씨는 어린 시절 부모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과 안정감을 배우자를 통해 해결하려고 했을 때 부모와의 관계가 없었던 경험으로 외로웠을 수 있었겠어요. 실제로 배우자는 제2의 부모이기도 해서 어린 시절의 상처를 씻어줄 수가 있거든요. 배우자의 사랑으로 평생 따라다니던 외로움과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사람도 있어요. 아마 키위씨도 남편의 신뢰로운 사랑으로 평생 따라다니던 불안정감과 외로움이 경감된 부분도 있고, 오랜 시간동안 아버지 관계의 부재로 남편이 잘 느껴지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친밀해지기 위해 먼저 다가가거나, 사랑 표현을 하거나, 원하는 것을 말하고 싶을 때, 갈등이나 고통을 위로하거나 받고 싶을 때 외로울 수 있죠. 남편과의 거리감이 크다면 연애할 때 느꼈던 기분 좋은 감정과 배려는 건강한 마음에서 나온 게 아니라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하려고 발달된 눈치에서 나왔던 것일 수 있어요. 각자의 히스토리에서 생긴 바람이 만들어 낸 허상이 크면 그 위에 지어진 집이 견고하지 않을 수 있어요. 그 결과는 지속적으로 소통이 되지 않고 외롭고 불안하다는 거죠. 외로움을 직면하지 않으려고 화를 내는 거구요. 부모에게서 채워지지 않은 자기애적 욕구는 늘 관계를 어렵게 하는 것 같아요.

성경에 ‘룻기’서를 좋아해서 많이 읽었던 기억이 나요. 거기에 나오는 보아스와 같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며 정말 열심히 기도했던 때가 있었어요. 부모로부터 심리 정서적 지원 뿐 아니라 물질적인 지원도 제대로 받아 본 경험이 없어 제 자신의 모든 것을 책임져 줄 상대를 너무나 간절하게 찾았던 것 같아요. 기도의 응답인지 운이 좋아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괜찮은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연애를 하던 6개월 동안은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행복하고 좋았어요. 문제는 결혼을 하고나서였는데 부모와의 관계에서 처리해보지 못했었던 여러 감정과 욕구들로 많은 좌절을 경험하면서 불행한 제 진면목을 보게 되었지요.

결혼 후 신기하게도 연애할 때 느꼈던 좋은 느낌들은 어디론가 갑자기 다 사라져 버리고 남편의 존재가 너무나 낯설고 어렵고 불편한 느낌만 남았어요. 뭔가 알 수 없는 불안정한 감정과 슬프고 불행한 마음 때문에 단 하루도 마음이 편하고 좋았던 때를 기억할 수 없어요. 남편의 말 한마디, 작은 행동과 눈빛에 저 사람이 나를 사랑하나 그렇지 않은가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어떤 것이든 저의 욕구가 채워지지 않으면 삐져있으면서 며칠 씩 말을 하지 않거나 화가 나면 서재 방 책상 위 물건들을 남편이 보는 앞에서 다 쓸어버리거나 물건을 집어 던지는 행동을 주기적으로 반복 했죠. 어떤 날들은 새벽 한 두시에 차를 미친 듯이 몰고 다니기도 했는데 그때 느꼈던 강렬한 감정은 외로움이었고 제가 세상에서 제일 불행하다고 느껴지는 감정이었어요. 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이런 행동들은 아무리 좋은 성경 말씀을 듣고 기도를 해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는데 종교적인 열심을 가지고 있었던 때라 이런 제 모습을 보면서 신도 저를 버렸다고 생각을 했어요.

관계에 대한 스트레스가 백혈병에 걸릴 만큼 컸었는데 죽음을 가까이 두고도 바뀌지 않았지요. 투병 중에 저의 인간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제가 선생님을 만나 수업을 듣고 상담을 시작했었죠. 비로소 제가 왜 이럴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씩 알게 되고 그제야 저의 파괴적인 행동들은 조금씩 멈추게 되었어요. 남편에게 저의 진짜 원하는 것을 표현하지도 못했고, 먼저 다가가거나 사랑을 표현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고 엄청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져 할 수가 없었는데 저는 남편이 제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해주길 바래서 그랬던 거예요.

기대했던 것이 돌아오지 않았을 때 분노 대 폭발하여 파괴적인 행동으로 결말을 삼았어요. 부모에게 정서적 채움을 받지 못했던 욕구들은 제가 어른으로서 동등한 관계를 하지 못하도록 했고 건강한 방식으로 욕구를 채우지 못해서 삶을 고통스럽게 만들었어요. 남편이 아무리 잘해주어도 이상하게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늘 남아 있지만 그래도 지금은 예전처럼 파괴적으로 관계하지 않아요. 오랜 세월 저의 성격적 문제를 정리하고 나니 이젠 남편을 잘 못 느끼는 문제가 남겨져 있어요. 제가 아마도 정신분석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남편을 사랑 없는 무정한 인간 취급을 하며 엄마가 아버지를 몹쓸 사람으로 느끼고 살았던 것처럼 저도 똑같이 그렇게 살고 있을 거 같아요. 그러고 보니 아버지의 관계만 회복 된 게 아니고 제 결혼생활이 완전 바뀐 역사도 있었네요. 이 영화 주인공은 폴이기도 하지만 저 이기도 해서 더 의미 있는 것 같아요. 부모의 부재로 인한 상처가 삶을 살아가는데 삶을 얼마나 고통스럽게 하는지 제 삶을 돌아보면서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어요.


3. 몬스터 콜을 보고(두리안님)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는 엄마, 학교에서는 왕따, 아빠와 함께 살 수 없는 현실은 어린 코너에게 너무 가혹하기만 하다. 아이에게 이 보다 더 최악인 현실이 또 있을까? 엄마를 떠나 보내야하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엄마의 병세가 더 악화되어가는 현실 속에서 코너의 마음이 얼마나 힘들지 공감이 간다. 몬스터가 들려주는 이야기 중에서 나는 첫 번째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몬스터는 첫 번째 이야기를 통해서 모순 된 것이 동시에 성립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왕자는 여왕을 내쫒기 위해 사랑했던 농부의 딸을 죽여 여왕을 살해범으로 몰아내고 왕이 되어 평화로운 나라를 만든다. 다행히 몬스터의 도움으로 여왕은 목숨을 잃지 않고 도망쳐서 살아간다. 왕자와 여왕의 모습을 통해 온전히 착한 사람도 악한 사람도 없고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그 두 사이의 어딘가에 있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 앞에서 순간 뭔가 잠시 주춤 거리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엄마를 지켜보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 그냥 끝났으면 좋겠다는 코너의 진심을 얘기해야하는 과정이 고통스럽고 처절하게까지 느껴졌다. 그로 인해 가졌던 죄책감 때문에 스스로가 ‘나는 제일 큰 벌을 받아야 돼’ 라고 얘기하는 코너의 모습도 너무 안쓰러웠다. 엄마가 오래 살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코너가 듣고 싶어 하니까 엄마는 계속해서 나아질 거라고 말했고 코너는 그 말을 믿기도 했고 한편으론 믿지 않았다. 그래서 ‘차라리 빨리 끝나라. 얼마나 외로울지를 상상조차 하기 싫지만...’ 두 가지 감정 사이에서 갈등하고 자기 때문에 엄마가 죽는 거라고 말하는 코너에게 몬스터는 그건 사실이 아니고 고통이 끝나길 바란 거 뿐 이고 당연한 거라고 얘기해 준다. 왕자는 살인자이면서 좋은 왕이었고, 약제사는 성격이 못됐지만 생각이 옳았고, 인간은 복잡한 짐승이여서 때론 고통스런 진실보다 거짓 위로가 필요할 때도 있다고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중요하지는 않지만 뭘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코너를 다시 일깨워준다.

코너와 한 마음이 되어 줄거리를 쫒아가고 있는 나에게 이와 같은 몬스터의 이야기는 나의 맘 속 어디선가 마음이 놓이는 경험을 하게 했다. 불확실 한 것과 애매모호 한 것을 잘 견디지 못하고 이것과 저것, 좋은 것과 나쁜 것, 내 생각에 맞춰 옳은 것과 그른 것 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나에게 세상의 일은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코너가 가지고 있던 갈등과 생각들이 하나하나 해결되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이 참 좋았다. 내적인 갈등이 있을 때도 자신의 진짜 속마음을 대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결국은 그에 맞는 과정들을 겪어 내야 성숙의 길로 갈 수 있는데 그 ‘과정’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되어서 그런 것 같다. 어려울 때마다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서 어려움에서 빠져 나오고 일이 해결 되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되지 않더라도 또는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큰 일이 생겨도 그것을 참아내고 감당 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내 자신에게 얘기해 본다.

나에겐 어떤 것이든 조금도 손해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커서 조금의 좌절도 하려하지 않는 태도가 있다. 또 문제가 생기면 문제를 해결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순간 그 자리에서 그냥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또는 누군가가 나타나서 해결해 주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있다. 기쁘고 좋은 감정이외의 다른 감정들은 느끼고 싶지 않아 외면한다. 그래서 나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더라도 해피엔딩이나 가볍고 재밌는 것만 보고 싶다. 조금의 불편한 것도 참을 수 없어 떨어 버리고 싶어서 안달복달 하는 나의 태도로 현실에 발을 내딛고 살지 못했던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발달을 연습해 보느라 시작했던 학교도 이제 곧 마지막 학기를 남겨 두고 있고 센터도 2년째 운영 중이다. 학교도 다니고 쉬는 날도 없이 거의 매일 일을 해보면서 내가 이 공부를 하기 전에 얼마나 아무것도 안 하고 살았는지 그저 기가 막힐 뿐이다. 많은 대가를 지불하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배우고 있다. 내 모습을 보면 이렇게 애쓰고 노력한 것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버리는 일이 생길까봐 걱정스러울 때가 많이 있지만 그래도 희망을 놓지 않고 싶다.

코너도 두리안씨도 또 세상의 많은 사람들도 아마 평화롭고 조화로운 실망이 없는 세상에 살고 싶어 해요.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세상에 살기 위해 노력할지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이런 노력은 실패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어떤 현상의 한쪽 측면만 보면요. 모든 평화와 조화 그 이면엔 불안과 갈등이 짝을 이루어 있는 것 같아요. 다른 사람에게 친절하고 배려하는 모습도 자신의 모습이고 분열과 갈등을 만드는 것도 자신이란 말이죠. 오히려 자신의 두 모습을 지각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갈등에서 놓여나기 쉽습니다. 부드럽고 따뜻한 면도 나요. 내 마음대로 하고 싶어 하는 거칠은 면도 나에요. 인간은 원래 모순된 존재예요. 이 상황에선 이렇게 살고 저 상황에선 저렇게 사는 존재입니다.

모순을 적절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는 안정된 정서가 필요한데요. 안정된 정서란 무엇일까요? 일상생활을 성실하게 살고, 자신감 있는 태도를 갖고, 감사해하고,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 아닐까요. 남이 좀 부족하더라도 약점을 참아주고 갈등이 일어나고 모순이 있다 해도 품을 수 있는 능력요. 이러한 거룩한 일관성은 원래부터 모순위에 있었어요. 부모는 자녀가 수없이 모순을 가져도 이를 받아주고 수용하지요. 이런 수용을 기반으로 자신의 일관성을 발전시켜 나가는 거구요. 인간이 가지는 일관성은 모순을 수용하는 사랑의 행위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인간이 원래 모순된 존재라는 것과 상황에 맞춰 이렇게 저렇게 살 수 있다는 말씀이 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품을 수 있는 더 넓은 마음과 생각을 갖게 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안정된 정서가 필요하고 자신의 모순을 수용 받는 경험을 통해서 일관성이 발달한다는 것의 연관성은 아직까지 잘 느껴지지가 않지만‘거룩한 일관성’이란 단어가 마음에 들어와 계속 곱씹게 됩니다.

두리안씨 아침에 눈을 떠서 이어지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일상적인 삶 말예요. 어떤 사람은 그저 의미 없이 돌아가는 쳇바퀴처럼 또는 감옥처럼 느껴질 수도 있어요. 또 어떤 사람에겐 한 순간 한 순간 소중한 의미를 부여해서 경험되는 자신이 살아있음이 축복이고 감사일 수 있겠고요. 후자의 경우는 자신의 경험에 연속성을 갖고 있는 경우일 거예요. 살아오면서 좋고 나쁜 경험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 수용한 삶의 자세요. 존재에게는 삶의 목적이 있고 뜻이 있다고 생각해요. 또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굴곡을 경험하면 더 겸손하고 조심하라는 뜻도 있겠지만 균형과 조화를 이루라는 더 큰 뜻이 있기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요즘 하루를 보내고 자리에 누우면 이렇게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고, 좋은 마음으로 일 하다가도 으이고 내 팔자야 하면서 한숨이 절로 나오는 때가 많이 있었는데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똑같은 일상의 삶이 어떤 사람의 경우 의미 없이 돌아가는 쳇바퀴나 감옥같이 느껴질 수 있다는 표현이 저의 상태라 생각되네요. 제가 경험의 연속성이 없어서 가치나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 잘 되지 않고, 좋고 나쁜 경험을 내 것으로 받아들여 수용하는 게 참 어려워요. 특히 나쁘고 힘든 경험은 절대 하고 싶지 않고 나에겐 그런 일이 생겨선 안 된다는 생각이 강하게 있어요. 나쁜 경험이란 단어만 들어도 강력한 거부감이 들어요. 얼마 전 유학을 간 아이의 학교적응문제로 마음이 복잡하고 어려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는데 선생님께서 주신 피드백이 힘이 되요. 아이문제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각성 상태가 되어 음식을 먹을 수 없고 자지도 못하는 상태가 계속되어 힘들었어요. 외부에서 무슨 자극이 들어오면 그것을 담아 소화하고 처리하는 능력이 없어서 이렇게 생활이 온통 마비 되어버려요. 현실이 없는 저의 상태와 좌절하지 않으려는 저의 본능 때문에 갈등이 크다고 느껴지네요. 살아가면서 여러 굴곡을 경험하면 더 겸손하고 조심하라는 뜻도 있지만 균형과 조화를 이루라는 더 큰 뜻이 있다는 말씀을 새겨보며 글을 올립니다.


4. ‘몬스터 콜’(체리님)
나는 지금보다 더 높은 자아발달을 하고 싶다. 이것이 현재 겪어내야만 하는 과제이고 소원이다. 생산적인 일을 제대로 완수하지 못한 상태로 집에 들어가 잠을 자고 음식만 섭취하는 퇴행을 몇 번이고 반복하며 답답해하는 힘든 나의 자아 상태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이고 이것을 어떻게 이겨내야 하는가? 우선 내가 당면한 과제를 정확하게 파악해보고 싶다. 최근에 선생님과의 상담을 통해서 나의 결핍된 부분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바로 상상계에서(유아적 수준) 벗어나 상징계의 삶을(어른의 정체성을 성취하라는) 살아내라는 과제가 나에게 주어진 것이다. 외부 현실에서 일어나는 실수와 실패 그리고 세상에 대한 탐색과 도전을 하지 못하고, 느슨하고 피상적인 인간관계의 모습은 나의 내면의 진실과 닮아 있다. 이젠 거꾸로 내면적 진실로(알고 느끼고 경험을 바꾸어) 외부 세계가 달라져 나의 정체성을 완성해야 한다.

유치한 어린아이와 같은 환상을 해소하고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복잡한 현실에서 살기를 진심으로 소망하기에 나의 몬스터를(퇴행욕구) 마주해 보고 싶다. 이 년 넘게 분석상담을 받으면서 선생님은 살아가면서 불안을 경험하고 괴로움을 견뎌 내는 게 성숙이라고 격려해주시고 현실로 따라오라고 하시지만 난 무의식의 진면목이 잘 보이질 않는다. 내 마음인데 내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뭐든 열심히 해서 인정받고 싶은 마음과 달리 늘 초라해지는 나를 바라볼 때마다 두려움과 외로움, 열등감, 수치감이 느껴진다. 밤마다 나를 마중 나오는 몬스터의 얘기를 이젠 감당할 수 있을까.

퇴행의 정의는 '성숙단계의 도전을 감당할 수 없을 때, 본능적 조직의 이전 단계로 후퇴'하는 것이다. 정신 기능은 그렇다면 어디까지 퇴행하는 것인가?
본능적 조직 이전 단계로 후퇴할 때 이전 발달 단계에서 해결되지 않은 갈등과 불안은 정신기구 안에 고착(약한 부분) 으로 남게 된다. 이 고착이 정신 기능이 어디까지 퇴행할 지를 결정하는 것이며 바로 자신이 이전에 극복했던 활동을 재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발달상 1.나는 어느 단계에 있고, 2.현재 어떤 성숙 단계의 도전에 부딪히는 것일까? 3.또한 나는 어디까지 퇴행하는가?, 4.퇴행의 양태는 어떠한가?

나는 최근 한 달 사이에 세 개의 꿈을 꾸었다. 먼저 꿈 내용을 소개하자면 첫 번째로 '똥과 오물' 꿈이다. 나는 중학생이다. 학교 내 복도와 여러 공간에서 똥과 오물이 들어있는 남자 소변기가 있는데(공간 가득히 뉘어져 있다) 이것을 다른 친구들과 치우고 있다. 나는 그것을 치우다가 넘어지고 다리에 오물이 튀었다. 오물에 닿지 않으려고 최대한 조심했는데, 결국은 다리에 묻어버린 것이었다. 불쾌했지만 이내 덤덤해졌다.

두 번째 꿈은 '품평회'에 대한 것이다. 나는 유학을 가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있다. 스튜디오 수업에서 학생들의 품평회가 열렸다. 나는 스티로폼 조각들을 핀으로 헐겁게 고정시킨 작품을 전시실 여기저기에 배치했다(작업을 위한 핀들이 바닥에 헤쳐져 있다). 작품은 견고하게 만들어지지 못해서 조금만 건드려도 툭툭 떨어진다. 그리고 헤쳐져 있는 핀과 압정을 밟을까봐 피해가며 조심스레 걷는다. 다른 외국 학생들의 작품은 도기/금속 등을 이용하여 지정된 한 자리에 견고하게 제작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미용실' 꿈이다. 나는 미용실에 머리를 커트하러 갔다. 헤어디자이너가 내 의사를 묻지도 않고 커트를 한다. 시간이 지나 보니 마치 왜구나 청나라의 변발을 연상하게 하는 스타일이 되어있다. 내 머리가 왜 이렇게 됐는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미용실 스태프들이 나에게 박수를 치며 요즘 유행하는 이 머리가 나에게 잘 어울린다고 말한다. 원하지 않았던 이 머리가 '정말 잘 어울리는 건가?'하고 긴가민가해 한다.

세 가지 꿈을 아우르는 공통적인 현실 자료로는 분별없이 급하게 수습한 상황 또는 사람들과의 접촉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불안과 실망이 컸다. '똥과 오물' 꿈을 꾼 시기에는 목적에 맞는 투자라고 생각했지만 다소 충동적으로 막연한 기대만으로 큰돈을 한꺼번에 써버렸다. 또한 막연히 분리개별화의 문제를 인식하고 섣불리 해결하기 위해 성급한 결정을 해버린 결과로 후회되는 어려움이 생겼다. 주체성을 가지고 좀 더 현실적으로 세상과 대결해보려는 시도였으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철저한 계산 없이 즉흥적으로 결정내린 이 과잉행동은 오히려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품평회와 미용실 꿈은 꿈꾸기 일주일 전에 친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을 또 기대하며 성급히 다시 약속을 잡아 만났지만 실제로는 오랜만의 만남처럼 신선하지도 신나지도 않은 시간낭비, 정서적 낭비를 한 지루한 시간이었다. 또 어머님이 이 주전에 장 내시경검사를 하시는 것을 알고 있었는데 생각을 못하고 있다가 집과 상담실을 하루에 두 번이나 오가게 되었고 약속장소를 숙지하지 않아 실수로 일어나는 일로 어머님에게 짜증이 났었다. 또 점심을 먹고 출발한 학원에서 동료와 간단하게 커피나 간식을 해도 좋았을 텐데 그 사람에게 맞추느라 과식을 한 경험과 얼마 지나지 않아 친분 있는 동생들을 집에 초대해서 음식을 대접했지만 가치 있는 대화도 그렇게까지 잘 되지 않았다. 사실 인스타 그램에 가방사진을 부탁하기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제대로 현실적인 검토를 통해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준비 없이 한 근거 없는 부탁이었기에 아무와도 소통되지 않았었다. 현실 자아가 미발달되어 실수를 바로잡지 못하고, 위 사례와 같이 나의 좋은 의도와 현실에서 벌어지는 상황이 늘 매치가 되지 않고(현실을 일부만 자각해서) 그리고 상징계 코드를 못 읽어 늘 엇갈리는 여러 가지 일로 내가 뭐하는 사람인지에 대한 허탈, 탈진, 분노, 짜증, 무가치감, 혼란, 무력한 감정이 자꾸 일어나 피곤하고 우울했다.

이 상황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까? 첫 번째로 나는 현실 원칙, 규칙에 대한 내면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결과 외부 현실을 분별하고 우선순위를 구분 짓는 조직화의 부재가 크다. 두 번째로 주체적으로 내 삶을 매니지먼트 못하는 상태로 그때그때 닥치는 상황에 휩쓸려 즉흥적으로 수동적으로 수습하기만 하는 모습이 있다. 세 번째로 이때마다 퇴행이 오는데 현실적 자아조절 기능이 없어져 주체적 행동을 못하거나 상식적이지 못한 행동 뒤 수치감으로 무기력하게 잠만 자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음식을 가리지 않고 섭취만 하는 모습이 크다.

나는 인격발달이 항문기 초기에 고착된 것 같다. 항문 괄약근은 항문기 후기에 발달하니 항문기 초기엔 괄약근이 조절이 불가능하다. 물론 내가 이 시기부터 전혀 발달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니라 엄마와의 관계에서 아버지 관계까지는 나아갔으나(외디푸스 진입) 어떤 스트레스로(또는 트라우마틱한 좌절로) 자꾸 항문기로 퇴행한다는 뜻이 정확할 것 같다. 물론 과잉 충족도 분리개별화 실패의 원인이겠다. 남근기에 좌절이 크면 좋았던 때로 되돌아가서 행복하고 싶은 마음이 당연하다(정신분석의 관점). 즉 싸는 낙으로 산다는 것이다. 첫 번째 꿈에서 남자 소변기가 바닥에 눕혀있던 게 인상적이었는데 배설이라는(앉아서 배변하기도) 상징적의미가 숨겨져 있었다(내가 충격 받을까봐 꿈이 변장을 시킨 것이다^^). 즉 양육자에게 수동적으로 의존하는 상태로서 수면만 취하고 섭취에 집중하는데 그 목적은 배설의 쾌감을 느끼기 위한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어머니께서는 먹을 때는 공부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데, 공부하기 싫어서 계속해서 먹을 것만 찾은 사실도 이를 입증한다. 현재에도 이는 반복적으로 외부 현실을 충동 조절 없이 모두 섭취해버리고, 배설로 일관하는 패턴이 강하다. 항문기 후기까지 발달을 해야 공격성도 적절하게 사용하고(자기주장, 집요함, 꼼꼼함의 유지능력 등), 창조성이 결실을 맺게 되는데 말이다.

또한 항문기는 배변훈련을 하는 시기로 규칙을 내면화하는 시기라고 배웠다. 삶에 대한 통제감과 자율감을 성취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내 마음대로 고집대로 사회적 상황을 무시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나는 규범화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아버지가 내재화되고 과대자기가 수정되는 변형적 내재화가 실패). 이년 넘게 분석을 받으면서 부모님의 문제가 객관화되지 않아 늘 답답하다. 부모에 대한 이상화와 함께 건설적 비판도 할 줄 알아야 하는데 문제의 구분이나 정도를 잘 헤아리기가 어렵다. 사실 현실에서 부모님과의 관계가 친밀감보다 거리감이 매우 크다.

추가로 유추할 수 있는 바는 현재 나의 발달과정에서 도전에 부딪히는 지점인데, 철저한 현실계산과 검증을 통해 현실을 선별/분별해야하는 과제에 도전하고 싶으나 잘 되지 않는다. 유능감을 갖고 싶으나 현재 나의 무능력과 비효율적인 시간사용, 현실과의 컨텍 제약의 원인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나는 늘 소망을 감정의 형태로만 표출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이러한 미숙한 감정만 있다는 것은 사실 환상속에 사는 것과 같다. 환상속에서는 모든 게 가능하지만 현실에선 그렇지가 않다. 어릴 적부터 나는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점차 진짜 감정을 표현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발달정지의 이유). 아버지도 나만큼 아니 나보다 더 외로운 분이시다. 요새 나는 아버지를 참 많이 닮아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아버지는 자수성가를 하신 성실하신 분이시다. 하지만 정신분석에서 배운바와 같이 성인 아이는 일을 잘하지만 정서적 관계를 잘못하고 정서적으로 어려워지면 해결을 못한다. 아마도 이러한 영향 때문에 나는 정서적 지원 없이 혼자서 지내온 것 같다. 대를 이어온 외로움 때문에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지금까지는 외로움 자체를 없애려 해서 문제가 생겼던 것 같다. 몬스터가 꿈에 나타나 아버지가 어떤 외로움을 경험하셨는지 보게 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아마도 같은 외로움이 일 것이다. 지금 이순간은 외로운 나를 수용하면서 아버지를 이해해본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나라는 주체에 기초한 기준과 가치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은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정원'로 부터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말을 잃은 채 이모들의 과잉보호 속에서 발달이 정체된 폴이 우연히 마담 프루스트의 도움으로 과거의 상처와 진실을 알게 되면서 분리개별화를 성취할 수 있었다. 나만의 주체성을 만들기 위해서는 영화 중 폴처럼 나의 뿌리인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철저한 객관화가 필요하다.

어머니는 나와 기질적으로 맞지 않아서 내가 기대하는 반응에 반대로만 행동하셨다.(엉뚱한 반응 / 하나마나한 반응)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나를 통해 강하게 이루려는 분이며, 하나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고 다양한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이 없으신 분이다. 그것은 나에 대한 성찰로 현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타인과의 공감능력이 떨어져 엉뚱한 반응으로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거나, 글에 담긴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글자 그대로 세상을 이해해 센스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는 또한 반대로 이상적으로 다른 관점을 통해 유레카 경험을 하는 것에서 행복을 느끼게 하는 원천(결핍에서 오는 욕구)이기도 하다.

아버지는 지금과 달리 내게 친구 같았지만 강한 이상화 대상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지금도 생각나는 바는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아버지가 손들고 벌을 서라고 하셨는데, 나는 그 상태에서 오줌을 바로 싸버려서 그 상황을 무마시켰고 부모님은 그것에 대해 처벌보다는 같이 웃으시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께서 너무 사랑스럽게 봐주셔서 해야 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나에게 강하게 경계 지우시지 못한 것 같다. 그리고 부모님 사이는 그렇게 좋지 못했다. 아버지는 나와 다르게 어머니의 종교생활을 강하게 막으셨고, 그에 대하여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는 자유를 억압하는 대상으로 아버지를 평가절하 하셨다. 무엇보다도 나는 금지의 언어, 즉 초자아가 약하게 형성되었다. 그래서 내게는 한계라는 것이 없다. 눈치보고 타인을 맞추는 것과 역으로 타인에게도 한계를 설정해주지 못한다. 자신 있게 참자기로서 타인에게 나를 표현하고 설득하는 것이 전혀 되질 않는다. 하여 경계 없이 타인에게 주인공 자리를 내주고는 실망감이 엄청나다. 그리고는 실망감의 원인이 나의 능력 탓으로 느껴져 타인의 기준에 맞지 않는 나라고 평가절하 한다. 이럴 때 나는 자신감이 무너진다. 부모님은 여러 면에서 부족하셨지만 자신들이 처한 환경과 능력에서 최선을 다하셨고 여러모로 과잉보호를 하신 것 같다.

여기까지 성찰하는 게 정말 쉽지 않았다. 현실에서 흐릿하게만 느껴지는 내 실체가 부끄럽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버겁기도 하다. 선생님은 내가 발달 과정 속에 있다고 위로 해주신다. 하지만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아이와 같은 심정이다. 올해 진정한 나를 발달시켜 보기 위해 새로운 도전으로 대학원에 입학했다. 전공 공부와 새로운 인간관계 경험으로 내년쯤 스터디에서 더 진보한 나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내사랑과 프레셔스(함께라면 상담스터디)

1. 내 사랑과 프레셔스(메론님)
나는 13명 대가족 속에서 자랐다. 종가 집 종손에게 기대했던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서 할아버지 눈 밖에 난 나는 울거나 보채거나 떼를 쓸 때도 할아버지 안 계신 곳에서만 가능했고, 17개월 차이나는 작은아빠의 아들이 태어나자 관심에서 밀렸으며 얼마 뒤 여동생이 태어나자 연달아 딸만 낳은 엄마의 분풀이와 넋두리의 대상이 되었다. 나는 시댁생활이 힘든 엄마의 분노와 냉담함에 늘 눈치를 봐야했고 따뜻한 돌봄을 받지 못한 불안함에 자주 울었다. 때론 환상의 세계로 숨으며 “엄마는 내 엄마가 아니야, 내 엄마는 따로 있어. 도대체 언제 나를 데리러 올까? 부처님 제 엄마가 빨리 절 데리러 오게 해 주세요” 하고 빌었다.

어린 시절 고통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딸이어도 괜찮다는 것을 시댁에 증명해보이기 위해 엄마가 바라는 이미지에 맞춰야했다. 왼손잡이를 강제로 오른손잡이로 바꾸게 했고, 말괄량이 호기심 많은 나는 얌전하고 조신한 아이여야 했으며, 사촌 남동생에게는 친절하고 양보하는 배려 깊은 누이어야했고, 고모들과 삼촌에게 도 인정받고 사랑받1.아야 했다. 엄마의 이러한 과한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 뿐 만아니라 “너는 양보하랬다고 그걸 홀랑 주면 어떻게 하니? 그럴 때는 그냥 먹어야지. 그건 왜 뺏겨, 악착같이 쥐고 있어야지”처럼 혼란스러운 코치까지 받아야했다. 매번 알아차릴 수 없는 엄마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때마다 “내가 너를 낳고 미역국을 먹었어, 너는 동생보다 못해. 쟤는 말 잘 듣고 울기를 하니? 생전가야 뭐를 사달라고 하니? 넌 동생보다 못해”같은 폭언을 들어야만 했다.

대신 엄마의 기대를 채워주거나, 엄마가 그렇게 하고 싶을 때는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었으며, 뭐든 척척 알아서 해주는 완벽한 본딩이 주어졌다. 대가족에서 분가한 엄마는 부녀회일과 여러 개의 친목회를 통해 늘 저녁이나 주말마다 바빴다. 밖에서 본 엄마는 즐거워 보였고, 남들을 잘 웃겼고 대장 노릇을 했다. 하지만 집에 오면 화를 자주 내셨다. 나는 학령기에 접어들면서 지적인 그리고 딸 바보였던 아버지를 이상화하면서 엄마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아빠는 한자와 영어를 가르쳐주시고 신문칼럼을 읽고 다정히 설명해주면서도 “공부 열심히 해서 의사 되라”는 말을 반복하며 말끝마다 핀잔을 주셨다. “난 수학을 못하고 난 연애잡지 기자될 건데”라고 했을 때도 “나 닮았으면 지능도 높고 똑똑할 텐데, 수학처럼 쉬운 게 어딨니? 나를 안 닮았나보다, 그것도 못하면 어떻게 해?” 하며 부족한 아이 취급을 하셨다.

또한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하고 본인의 뜻대로 안되면 폭언으로 나를 통제하는 엄마 대신, 아빠와 친하게 지내자 아빠와 내 사이를 시기하는 엄마는 아빠와의 부부싸움의 원인을 늘 내 탓으로 돌렸다. 그런 엄마가 미웠고 짜증이 났지만 나는 집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엄마가 싫었지만 엄마가 제공하는 많은 것들 안에서 나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밥을 해본 적도, 설거지를 해본 적도, 청소를 해본적도, 내 속옷을 빨아본 적도 없었다. 집이 주는 정서적 분위기가 싫어 엄마에게 악다구니를 쓰고 덤빌 수 있으면서도 이렇게 편하게 살 곳은 없다는 걸 알았기에 중학생 이후부터는 아예 엄마를 마음속에서 식모 취급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나는 클라레스와는 달리 엄마와 아빠 사이를 오가면서 아주 자기중심적으로 살았기에 여러 상황에서 귀신같이 내가 어떻게 살아야 내 에너지를 덜 쓰고 남을 이용하면서 편히 살 수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잘 찾아낸다. 예전에 내가 부모교육 공부를 안 했을 때는 내가 복이 많은 좋고 괜찮은 사람이라 내 주변에는 늘 헌신하고 베푸는 삶의 조력자가 많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내 주변에 누가 내 무의식의 짝꿍일까? 를 생각하게 되고 혹시 그런 누군가가 있다면 나도 관계 속에서 누군가를 이용하는 대신 내 무의식의 짝을 도와 무엇을 나는 진짜로 줄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하게 되었다.

부모와의 좋은 애착을 갖지 못한 나는 결혼을 해서도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남편은 늘 내게 “외롭다. 따뜻하게 대해 달라”는 말을 참 많이 하고 살았다. 그럴 때마다 늘 내 방어에만 급급해서 남편에게 거짓으로 안심을 주고 나를 믿어보라는 말로 속였다가 돈이나 남편의 물리적 힘이 필요할 때 부분적으로만 관계를 했다. 늘 다 줄 것처럼 행동하다가 내 몫을 채우면 그 다음날은 부부싸움을 해서 내 곁에서 쫓아버렸다. 나의 필요함과 다르게 사랑과 관심을 바라면 짜증이 났기 때문이다. 그럴 때 내 행동에 속은 배신감에 보여준 남편의 분노와 화를 이해하기보다 “못 받아서, 무식해서, 분노조절 장애가 있어서”처럼 여러 이유를 붙여서 평가 절하하며 “그러니까 내가 널 싫어할 수밖에 없는 거야 하며 엄마가 내게 했던 온갖 부정적인 거부적 표현을 하며 남편과의 관계를 단절 했다.

영화 내 사랑에 나오는 모드가 함부로 대하며 모멸감까지 주는 에버렛의 말과 행동에 분노로 되갚거나 도망가지 않고 마음의 문을 열도록 한 점이 너무 부러웠다. 왜냐하면 나의 결혼은 늘 분노, 거부, 부분적 관계, 다시 철수하는 패턴의 반복이었으니까. 나와 달리 무조건 맞춰주면서 병리적 의존을 맺은 것도 아니고, 서서히 자신이 갖고 있는 매력과 지혜로 결국 에버렛을 바꾸며 결혼을 통해 진짜 독립을 이룬 모드는 외적으로는 못난이였으나 정말 성숙하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두 영화를 보고 내가 느낀 점은 “사랑의 힘”이다. 아이를 둘이나 둔 엄마이고 40대 임에도 얼마 전까지 나에게 “사랑”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사랑 받음, 따뜻함, 기쁨, 만족”같은 어린 아이 수준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전에 내게 “사랑”이란 주로 받는 사람의 수동적 입장이었다면 신앙을 갖고 점차로 사랑하면 “주고받음, 나눔, 함께, 고통, 따뜻함, 감사, 아픔”의 이미지로 바뀌는 경험을 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표현 하고 싶은 것이 있다. 나는 의식에서 성장하고 싶다고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고 말하지만 내 무의식은 실수나 실패에 대한 구체적인 진실에 직면하는 것을 너무나 부담스러워 한다(아니 무력하게 느낀다). 무조건적으로 단지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는 게 두려운 아이가 내 안에 있는 걸까?. 특히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성의 피드백이 유독 부정적으로 느껴진다. “잘했다” 이외의 피드백을 들으면 특히 내 일과 나와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내 존재를 위협받는 느낌이 일어난다. “역시 나는 안 되나봐, 그럼 그렇지, 나 같은 사람이 그렇지 뭐, 이러다 버림받는 거 아니야? 그럴 바에야 내가 먼저 버려야겠다. 나 안해, 그만둔다고 해야지”하는 반복적 프로세스에 시달린다.

나를 위한 애정이 담긴 피드백에도 그 상징을 읽지 못하고(사실 지적하는 사실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나와 사건이나 사람사이의 연결을 위해 이용해야하는 상식적인 개념이나 기술이 그 순간 찾아지지 않는다. 귀에, 정신에 담아지지 않는다), 부정어로 인식되면서 아주 불안이 커질 뿐이다. 그러고는 그럼 어떻게 그 사람에게 맞출지 마음만 급해져서 엉뚱하게 맞추고 또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한다. 늘 엄마에게 잘했다/못했다, 나쁜 애/착한 애로 평가 받았기에 친절한 어른이 늘 의심스러웠다. 내 것을 소모시키고 하찮게 여길까봐 불안했으며,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인지 내게 상처 주는 사람인지의 구분이 모호했다. 그래서 주변에 좋은 사람들에게는 시기심이, 근거 없이 나를 미워한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복수심이 생기곤 했다.

이번 과제를 하면서 선생님의 피드백에도 존재가 무너지는 공포를 느꼈다. 시간이 지나고 선생님의 피드백에서 오는 수치감이 점차 사라지면서, 성찰의 기회를 주시고 그 기회 안에서 내가 얻고 배워야 할 것들 알려주시고자 하는 선생님의 마음이 읽혀져서 다시 따뜻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주관적 환상에 사로잡혀 타자가 잘 인식되지 않는다. 그래서 모순을 빨리 수정할 수가 없다. 선생님의 구체적 피드백이 온전히 들리지 않고 오히려 이해가 안 되는 모순으로 느껴진다. 특히 선생님께서 나 외에 다른 대상을 염두에 두고(다른 사람입장에서) 생각하고 표현하라는 말이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어떤 절차가 생략된 나의 개인적 경험으로 인해 즉 상호작용의 결과의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항상 난 혼자만의 판단으로 옳고 그름을 결정짓는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많이 받고 산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독불장군처럼 자족하며 살아온 것 같다. 물론 엄마와의 관계 다이나믹에서 나온 것이겠지만 말이다. 힘들겠지만 시간을 두고 스터디를 통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진지한 고민과 노력을 해보고 싶다.


2. 영화 : 내사랑(수박님)
닉슨 전 대통령이 부통령으로 재직하던 때인 1960 년대로 추정되는 미국의 한적한 어촌마을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 영화는 정신은 건강하지만 관절염으로 자기 몸조차 가누기 힘든 주인공 모드와 고아원에서 자라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생선장사, 장작판매 등 닥치는 대로 생계를 유지하며 홀로 살아가는 남자 주인공 에버렛 루이스의 이야기이다. 모드는 결혼은 고사하고 가정부 일조차도 꿈 꿀 수 없는 외적인 여건과 신체적인 조건을 지녔음에도 자신의 주장을 관철해 나가면서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운 에버렛에게 접근하여 자신만의 방법으로 결혼에 성공하고 사랑을 확인해가는 과정을 평범한 일상처럼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우여곡절의 결혼 후 모드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하던 일인 그림을 그리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집안을 그림으로 가꾸던 중 우연히 뉴욕에 사는 산드라의 눈에 띄게 되어 세상에 알려지게 되면서 신문 방송 등에 출연을 하게 되고, 유명인사가 되어 닉슨 부통령으로 부터의 그림 구매를 주문 받는 상황까지 되었다. 유명세로 인터뷰에서는 자신의 남편이 생선장수라는 사실을 당당히 밝히고, 작가 서명란에 에버렛의 이름까지 써넣는 배려심과 남편에 대한 존경심을 보여준다.

모드는 자신을 집안의 수치로 모질게 대한 죽어가는 숙모로부터“끝내 행복을 찾은 것은 우리집안에 너뿐이었다”는 말에 “그런 것 같다”는 답변을 하여 자신의 행복을 확인하기도 한다. 에버렛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는 설거지나 집안청소 등을 자신이 모두 하고, 부인은 그저 그림만 그리고 있다고 툴툴 대면서도 모드의 사소한 일상의 부탁까지도 모두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속 깊은 남자로 변신한다. 아마 자신의 부족한 부분인 요리나 생선 거래장부의 작성, 집안 꾸미기 등을 자신의 아내인 모드가 사랑으로 채워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소한 다툼으로 일시적으로 떨어져 있던 때 모드를 찾아간 에버렛에게 모드가 뭐가 보이냐고 묻자 “내 아내가 보인다며” 처음부터 그랬다고 답한다. 그리고는 나를 떠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한다. 모드는 “내가 왜 떠나” 라고 답하면서 당신과 있으면 바랄 것이 없다는 말로 둘의 사랑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그러면서 왜 내가 떠날 것 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묻는 모드에게 에버렛은 “나보다 훨씬 나은 사람이니까”라고 답한다. 폐렴으로 고생을 하다가 모드가 죽자 에버렛은 “내가 왜 당신을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까”라는 독백이 모드의 상실이 커다란 짐이 되어 다가 왔음을 가슴 아프게 보여주고 있다. 홀로 집으로 돌아온 에버렛은 그림을 판다는 광고를 치워 집안으로 가져간다. 모드가 남겨놓은 흔적인 집안 곳곳에 그려놓은 꽃과 그림들이 또 다른 황량함이 된다.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나의 첫 느낌은 이영화가 작가의 상상으로 만들어낸 허구적인 이야기 같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영화 주인공 모드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 내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과는 정말로 판이하게 달라서이다. 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모드가 매사를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긍정적으로 해석하면서 자신의 장점을 활용하면서 삶을 살아가는 방식이 너무나도 생소하고 경이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 저런 상황에서에서 저렇게도 반응하며 살아갈 수가 있구나 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것은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여주인공 모드가 자신의 여러 가지 외적인 결함에도 불구하고 시끄럽거나 큰 다툼 없이도 적절히 자신의 주장을 펼치면서 결국에는 “나는 사랑 받았소” 라는 독백을 하고, 에버렛도 자신의 아내가 자신보다는 훨씬 더 나은 사람이라는 고백과 함께 자신을 떠나지 말아달라는 부탁을 함으로써 사랑의 쟁취자로서 삶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의 끝부분에 실존 인물들로 보이는 노부부의 생활상을 잠깐 보여 줌으로서 이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였음을 알게 해주었다.

류마티즘 관절염은 지금도 치료시간이 길고 면역력 결핍과 다중적인 질환이 동반되어 여러 신체 심리적인 증상으로 인해(우울, 무력함) 삶의 질이 떨어져 고통이 따르는 어려운 질환중의 하나일 것이다. 영화 속의 1960 년대에는 더 어려운 질환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유지 할 수조차 없을 만큼 어려움이 따르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더구나 돌봐주는 부모님까지 돌아가신 뒤에는 더욱 그랬을 것이다. 모드는 부모님과의 좋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살아가면서 좌절하거나 최악의 상황에서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매사에 긍정적인 반응을 선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박탈이 심한 남편에 대해 지나치게 민감하거나 적대적이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상대방이 보여주는 데로, 말하는 데로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모드 역시 처음엔 남편의 타인을 신뢰하지 않는 거친 말과 행동에 상처를 받고 모욕 받은 자신에 대해 울기도 하고 화도 내고 요구도 했지만 부정적인 감정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모욕과 분노를 받았을 때 똑같은 강도로 잔인하게 표현하지 않았다고 해서 상처받지 않은 것은 아니다. 똑같이 상처를 받지만 모드처럼 부모님과의 좋았던 경험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동으로 작동한 사람은 자신이 겪은 어린 시절의 좋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해 환경과 상대방을 참아내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에버렛은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려졌고 고아원에서 정서적으로 춥게 자란 사람이다. 좌절된 분노가 엄청나 아내가 자신을 존중해서 또 다른 사람에게 이상하게 비칠 동거에 대해 유머로써 대처하는 모습에 오히려 에버렛은 사랑받지 못한 수치감이 자극되어 따귀를 때리는 미숙한 행동을 했다.

나는 에버렛처럼 내면 깊은 곳에 분노가 많다. 분노가 높다는 것은 사람에 대해, 관계에 대해 피상적으로만 보게 되어 다른 사람의 무드나 입장에 대한 상황판단이 단조롭고, 불편한 한 가지 사실에만 집중해서 부정적 판단을 하고, 다양한 원인이나 과정을 파악하고 느끼지 못해 여러 관계 안에 일어나는 정상적인 복잡한 것들을 놓치고, 신뢰로운 친밀한 관계를 못한다. 중요하고 사랑하고 좋아하는 대상을 잃은 다음에야 외로움을 처절하게 느낄 때 비로소 후회와 함께 잘할 걸이라는 아쉬움이 일어난다. 모드처럼 일관되게 나를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대상이 있다면(상징적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도 누군가와 함께 있는 에버렛이 되겠지.

나는 상당부분 분노가 조절되지 않아(인식하고 처리) 특히 잘못되고 부정적 상황에서 다시 배우고, 익히고(실천하고 회복하는) 알게 되는(창의성) 능력이 지속적으로 손상된 것같다. 그 결과 문제의 원인이 늘 상대 때문인 것 같고, 불행하고 비극적인 결과를 기대하고, 풍요로운 정서로 따뜻한 친밀한 관계를 못하고, 늘 적대적이거나 우울하고 공허한 삶을 살아 갈 수밖에 없었다. 만약 내가 모드였다면 모드가 처한 상황들에서 어떻게 반응 하며 살았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나 자신을 스스로 철저히 고립시키고 비하하면서 아무하고도 관계를 맺지 못하고, 아무것도 시도하지 못한 채 온통 세상을 지옥으로만 느끼며 살다가 생을 마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야 항상 불평불만을 입에 달고 모든 일에 남 탓만을 해대며 부정적이고 미숙한 삶을 살아왔던 내 정신의 역동의 원인을 알 것 같다.

영화 : precious
1981년도 뉴욕의 할렘가에서 16살의 클라레스는 시도 때도 없이 화를 내면서도 손 하나 까딱하지 않으면서 딸에게 모든 것을 시키기만 하는 엄마와 살고 있다. 클라레스는 어릴 적부터 아빠에게 성폭행으로 이미 한 아이를 낳고 둘째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데, 둘째 아이의 임신 사실로 학교에서 퇴학까지 당했다. 다행히 대안학교로 전학을 가서 만난 선생님 레인의 도움으로 문맹상태에서 개화를 하듯 글을 깨우치게 되었다.

둘째 아이도 출산하게 되었는데, 자신의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안아든 엄마는 태어난 지 3일밖에 안된 아이를 내 팽개쳤다. 클라레스는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집을 나오다 계단에서 굴러 떨어졌음에도 아이만은 끝까지 다치지 않게 보호를 한 후 엄마의 집으로부터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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