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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헛강의를 마치고.
코헛반(rroye@hanmail.net) http://www.freudphil.com
2014년 12월 23일 20:23 1784
1. 아버지(노랑님)

4년 전 부모교육 수업을 듣기 전까지 아버지에 대해 엄마를 평생 괴롭히고 부려 먹으며 살아온 괴물 같은 인간, 세상에 존재하면 안 되는 정말 나쁜 인간, 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만날까봐 결혼은 하고 싶지 않았고 돌아가시면 장례식에 절대 가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면서 살았다. 엄마는 아버지 때문에 힘들면 아버지에 대한 불만을 아버지 앞에서 말하지 않고 내 앞에서 말씀하셨고 아버지를 너무나 싫어하고 미워하고 분노한 마음들을 거르지 않고 표현하셨다. “치사스러워, 반찬값으로 ~ 밖에 안 주고........ ” “니네 아빠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못 하고 맨 날 집하고 가게만 왔다 갔다 하느라 내 머리가 돌 머리가 다 됐어” “나를 일 못한다고 ~엄마랑 비교를 하고 ............ 어쩜 그렇게 구박할 수가 있냐...........”

외갓집 식구들은 어린 나를 앞에 세워 놓고 “니네 엄마니까 저 인간 성질 다 받아주고 참고 산거야. 어떤 여자가 니 아빠 옆에 붙어 사냐? 니 엄마가 고생을 무지하게 했지......... 제일 불쌍하게 살았어.” 어느 누구하나 아버지 편에 서서 얘기해 주는 사람 없이 모두 하나가 되어 아버지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 엄마가 아빠에게 맞는 모습을 보기도 했고 서로 소리를 지르며 싸우는 모습을 보면 나는 그 싸움이 왜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맞고 있는 엄마가 불쌍하게 보였다. 엄마한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볼 때마다 어려서부터 주변 사람들이 아버지의 ‘나쁜 인간성’ 에 대해 말한 것을 뒷받침 해 주는 결정적인 증거처럼 보였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먼저 사라져야 할 사람은 아버지라고 생각했다.

성인이 되면서 나는 완전 엄마편이 되어 엄마가 나에게 와서 아빠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거나 엄마를 불편하게 만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시면 내가 더 열 받아서 엄마보다 더 많이 분노하고 아버지를 미워하고 욕을 했다. 한바탕 내가 그러고 나면 엄마는 마음이 가라앉으시는 것 같았고 내가 아버지에 대해 느끼는 분노와 미워하는 마음은 더욱 커져갔다. 언제부턴가 나는 나도 모르게 남자가 여자를 괴롭혀서 고통 받는 이야기를 듣거나 기사화 된 글을 읽거나 하면 그것이 나에게 일어난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게 죽이고 싶은 분노와 증오심이 올라오는 걸 마음에서 매번 경험하게 되었다.

엄마도 그렇지만 아버지에 대한 좋은 기억이나 느낌 감정은 없다. 아버지는 말 보다 주먹이 먼저 나가시는 분이다.
덕분에 어려서부터 맞기도 많이 맞았다. 잘못을 해도 맞고 실수를 해도 맞고 이해를 못 해도 맞고......... 솥뚜껑 같은 손으로 뺨을 사정없이 맞은 기억, 음악 공부를 하겠다고 했을 때 발길질을 당했던 기억. 학교를 졸업할 때마다 졸업식엔 일해야 된다고 엄마만 보내시는 아버지한테 너무 섭섭하고 실망했던 기억. 가게에 손님들이 수선할 물건들을 가져 오시면 약속한 날짜를 매번 어기셔서 손님들이 몇 번씩 가게에 다시 오셔야 했고 “아저씨 또 안 해놓으셨어요? 벌써 이게 몇 번째야~~” 하시면서 돌아가시는 모습을 날마다 보면서 ‘아빠는 도대체 왜 저러실까?’ 생각하면서 아빠를 창피스럽게 여겼던 기억. 늘 11시가 다 돼서야 일어나 가게에 나가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런 아버지가 나는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가게에서 일만 하신다. 친구들을 만나러 가신다든지 친구들이 놀러 온다든지 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나는 아버지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워보고 의논해보고 함께 해 보고 했던 경험이 없다. 그래서인지 내가 성장 했을 때 좀 괜찮아 보이는 어른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저 분이 내 아버지였으면.............’ 하고 생각을 했다.

정신의 구조는 관계를 통해서 만들어 진다는 말씀을 수업 시간에 들었는데 나는 아버지든 엄마든 내 부모에 대해선 아무런 그림도 그려지지 않는다. 내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에 대해 알아가는 경험이 엄마로 인해 ‘정말 나쁜 인간’으로 경험되어 엄마와 똑같이 보고 느끼고 있었다는 것과 아버지도 심한 결핍과 너무나 보호받지 못하고 자란 분이시기 때문에 나와 전혀 관계 하실 수 없으신 분이었다는 것을 수업과 상담을 통해 정리하게 됐다.

40년이란 시간을 아버지와 아무런 관계도 하지 않고 살았지만 지금은 회복 중이다. 엄마가 씌어 준 ‘나쁜 인간’이란 시선을 내려놓고 내가 아버지에게 다가갔을 때 느꼈던 어색함, 낯선 느낌을 어떻게 표현 할 수 있을까? 지금은 시간이 제법 흘러 엄마가 가게에 계시지 않은 시간에 가서 아버지와 옛날 얘기들을 하면서 이젠 아버지 편이 돼서 엄마 흉도 보고 “아빠 , 그땐 왜 그랬어?” 하고 물으며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물으며 내 안에 있던 오해를 풀어가는 시간도 갖고 , 때로는 아버지 ‘기’ 도 살려 드리고 좋아하시는 달달한 간식거리들을 사다드리고 .......... 가끔씩 들르는 가게지만.......... 아버지가 나를 기다리신다. 그동안 아버지가 혼자서 얼마나 외로우셨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잘 못 알고 있었던 것 때문에 아버지는 내 인생에서 가장 몹쓸 사람이 될 뻔 했는데...........

아버지와의 관계가 ‘없음’ 으로 인해서 생긴 내 ‘부족함’ 들은 어떻게 해결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가 내게 남겨진 발달 과제인데 나는 그것을 상담을 통해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지금 하고 있다. 나한테는 가치를 추구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배움을 지속해 보고 누군가를 닮고 싶어 하는 마음은 (자극 받을 때 아주 잠깐 씩) 있었지만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을 해 본 경험이 없다. 지금 생각해 보니 노력할 만한 그 어떤 아이디어도 떠오르지 않았고 에너지가 전혀 없는 - 무엇을 하든 할 만한 마음이 전혀 없는 상태였던 무기력함 덩어리 그 자체였던 것 같다. 학업에서 실패 , 사회생활은 해 보지도 못했다. 힘이 들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뭔가 다른 대안은 없는 걸까?” 하고 찾는 것이 아니라 그냥 거기서 끝이다. 나는 언제나 늘 그랬다.

하지만 지금 나는 이 부모교육 수업을 4년째 듣고 있고 마지막으로 14주를 남겨 놓고 있다. 그리고 올 한해 동국대학교 사찰음식 연구소에서 1년 과정의 수업을 듣고 졸업 작품전과 함께 기초반 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그 시간들을 견뎌내고 수행해야 하는 과제들을 해내는 것이 너무 어려웠다. 시간을 제 때 맞춰서 가야하는 것도 쉽지 않았고 수업을 가기 전 까지 마음속에서 ‘갈까’와 ‘말까‘ 가 다툼을 하기 때문에 결석하지 않고 참석해야 하는 것도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잘 하고 있다가도 갑자기 의미 없게 느껴져서 때려 치고 싶은 유혹이 올라 올 때 제일 힘들었지만 결석하지 않고 결국은 다 해냈다. 그동안에 경험하고 연습했던 것을 바탕으로 내년엔 다른 분야를 공부하기 위해서 학교에 다닐 계획을 하고 지금 원서를 작성 중에 있다.

내 결핍 때문에 아이를 제대로 볼 수 없어서 나와 똑같은 문제를 가지게 된 아이는 학원은 말할 것도 없고 힘든 일이 있으면 학교를 가지 않으려고 했고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해야 할 것들에 대해서 많은 것을 회피하고 미루며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했으며 화가 나면 자기 방에 있는 물건들을 다 집어 던지며 분노 대 폭발 하기 일쑤였는데..........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너무 끔찍하다.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 김은옥 선생님의 도움으로 1년6개월에 걸친 사회성 프로그램 치료, 멘토 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오셔서 학업에 필요한 전반적인 도움을 주시는 선생님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외부에서 있는 좋은 캠프나 패스파인더 활동들도 적극 활용하였다.

이렇게 노력한지 4년째........... 이제 아이는 점점 힘이 생겨서 자기를 조금씩 표현하며 자기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내주는 수행평가 뿐 아니라 시험기간엔 혼자서 새벽 1-2시 까지 공부를 해내는 힘도 생겼다. 숙제뿐 만이 아니라 공부도 빡세게 시키시는 담임선생님 밑에서 아이가 인정받기 위해 힘들지만 참고 해내는 모습에 많이 놀랐다. 6학년 올라와서는 좋은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 애쓰더니 올 해 1년 가장 좋은 성적들이 나와서 성취감도 느끼고 자신을 뿌듯하게 느껴보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힘들고 어렵게 공부해 가는 아이를 보면서 무엇인가 좋은 것을 얻고 또 그것을 유지 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건지 아이를 통해 배우는 시간이 되었고 아이의 성취는 내게도 큰 기쁨이 되었다. 지난 수학여행 때는 6학년 전체 아이들 앞에서 자기 반 대표 로 나가 춤을 추기도 했다는 얘기를 듣고 놀라기도 했다. 그러더니 요즘은 앞에 나서서 활동하는 것을 즐기는 거 같다. 달라진 우리 아이의 모습이다. 앞으로 나 뿐 만 이 아니라 우리 아이에게도 욕망을 변화 시킬 수 있는 좋은 대상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사회에서 주는 좋은 에너지를 받아 계속 성장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나와 내 딸이 우리 부모님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살고 있었지만 이제 겨우 그 세계를 빠져 나와 조금 세상을 향해 걸어 나온 것 같은 느낌이다. 이곳 연구소와 인연을 맺고 오랜 시간을 함께 해 왔던 시간들을 돌이켜 보니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다.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여기까지 오는 것이 결코 쉽지만 않았는데 ............. “참 잘했다”고 내 자신에게 말해주고 싶다.



2. 이상화대상 (보라님)

나는 요즘 미생 보는 재미로 산다. 이 드라마는 어렸을 때부터 바둑 기사가 되기 위해 바둑만 두다가 프로가 되는 것에 실패하고, 집안 형편도 어려워서 결국은 26살에 아무런 스펙 없이 낙하산으로 종합상사에 입사하여 겪는 장그래라는 청년의 이야기인데, 나는 개인적으로는 장그래보다는 장그래가 절차를 무시하고 자격도 없이 낙하산으로 들어왔다고 백안시하는 쪽의 입장에 더 공감하는 편이다. 그래서 장그래 얘기에는 큰 울림이 없었는데, 장그래가 속한 영업 3팀의 리더인 오차장님이 부하직원들의 입장을 고려해서 도와주고 외부의 부조리한 일들을 책임지고 막아주며 부하직원들을 안심시키고 일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주는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차장님 밑에서 일하는 그들이 너무 부러웠다. 남편과 함께 보는 내내 best of best 상사라면서 나도 저런 사람 그늘 밑이라면 죽도록 충성하고 싶다고 관우와 장비가 유비한테 충성을 맹세하듯이 결의를 다졌는데, 내가 왜 이렇게 오차장님 캐릭터에 감동하는지 이 코헛 숙제 때문에 다시 생각하게 됐다.

올 7월쯤에 동생과 전화 통화하다가 울컥했던 일이 생각난다. 동생이 자기 친구의 퇴직금 얘기를 하다가 내가 ㅁ직장에서 ㅇ직장으로 넘어 오는 과정에서 일주일이 모자라서 퇴직금 못 받은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동생이 언니는 항상 남을 배려하다가 자신을 못 챙긴다면서 자기 이익 좀 챙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 말이 내게는 남 눈치 보다가 결국은 자기 것도 못 챙기는 바보, 또는 남 눈치만 보는 비굴한 사람 같다는 얘기로 들려서 확 공격성이 올라왔는데, 전화를 끊고도 뭔지 모를 것들이 올라와서 복닥이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두서없이 돌아다녔는데도 다독여지지가 않았다. 이 일이 평면화 되어 있던 내 마음들을 입체적으로 펼쳐지게 한 사건이 되었던 것 같다. 사실 동생은 자기랑 가까운 사람이 손해 보는 게 안타깝고 속상해서 내 편에서 챙겨 주는 말을 했던 거 같다. 그냥 ‘그러게~나도 좀 속상하네.’라고 담담히 받으면 되는데, 그러지 못하고 나를 챙겨주는 사람을 향해 확 공격성을 내 뿜는 내 모습은 어디서부터 출발한 것인가를 여러 날 생각해 보았는데, 아마도 나의 어린 시절 때문인 것 같았다.

시어머니 모시고 살면서 시집살이 하는 엄마와, 할머니와 엄마 사이를 조율하지 못하고 할머니 앞에서 엄마를 무시하는 아빠, 과부로 살아오면서 아빠를 남편 삼아 의지하며 아빠와 엄마 사이를 이간질하는 할머니....이렇게 나를 둘러싼 어른들의 눈치를 보며, 늘 그들의 욕망의 거울이 되어 그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삶을 살았던 내 모습을 들킨 것 같아서 수치스러웠기 때문에 동생한테 공격성을 날린 게 아닐까 싶었다. 애써 다독이며 괜찮다고 이게 독립적이고 책임감 있는 거라고 자신을 위로하며 살고 있었는데, 동생의 그 한 마디에 눌러 놨던 감정들이 봉인해제 된 느낌이 들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엄마는 늘 나한테 와서 할머니와 아빠에게서 받은 모욕과 분노를 토로했고, 할머니도 엄마가 자신을 뒷방 늙은이 같이 대한다며 나한테 엄마와 아빠의 비하인드 스토리들을 퍼부어 댔다. 이런 어른들의 이야기들을 통해 부모님이 사실은 얼마나 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인지에 대해 알게 되었고, 할머니 자신도 얼마나 아픈 사람인지 그래서 얼마나 살지 기약할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상황에 눌려서 너무 힘든 마음에 자신도 소화하지 못한 일들을 또래보다 덩치도 크고 늘 조용히 잘 들어주는 나한테 쏟아 놓은 것이겠지만 나는 그 이야기들을 들으니까 더욱더 그들이 못미더웠고, 그래서 더욱 그들에게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갔던 것 같다. 부모님과 할머니의 사정과 형편을 아니까...안다고 생각했었으니까 차마 그들이 힘들만한 일들을 요구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혼자서 병원에 다녔고, 학교에서 돈을 내고 먹는 우유도 부모님께 우유 좀 시켜 달라는 말을 못해서 한 번도 돈을 내고 먹어 본 적이 없다. 동생은 초코 우유보다도 비싼 요플레까지 먹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심지어 고등학교 때는 아침마다 용돈 200원씩을 받아서 썼는데, 사실 그 돈은 스쿨버스 회수권 비용도 되지 못했다. 그 당시 회수권 한 장 380원이었다. 30분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는 길을 걸어서 등하교 했고, 그 돈을 모아서 친구들과 만날 때 썼는데, 사실 동생은 어떻게든지 부모님께 떼를 써서 가끔은 택시도 타고 다녔다. 같은 부모님 밑에서, 같은 집에 살았는데도 동생과 나는 다른 환경에서 다른 것을 경험하며 살아 왔다. 나는 그때, 동생이 철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라도 장녀 노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내가 그렇게 빠듯하게 사는 것에 대한 자부심까지 있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행동들은 내가 그들을 믿고 기댈 수 있는 어른으로 생각하지 못해서 한 고생이었던 것 같다.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어서 이런 경험들이 모두 부질없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도 내가 만약에 이상화축이 단단히 구축되어서 어른에게 의존할 수 있는 믿음을 갖고 살았다면, 스스로 나를 지키기 위해 불안 떨며 살지는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가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버려진 고아 같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그런 마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늘 불안했던 것 같고, 그래서 챙겨주는 고마운 마음을 온전히 받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서 너무 밀착되는 관계에서는 내가 부모님과 할머니에게 그들의 욕망을 비춰주는 거울 역할만 하고 내 욕구는 무시되었듯이 내가 그 사람에게 흡수 되어 버릴까봐 무서워서 싫었고, 너무 멀어지면 버림받은 것 같아서 불안해져서 또 마음이 서늘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늘 나를 가이드해 주고 안정감 있게 보듬어 줄 수 있는 관계를 소원했는데, 아마도 이러한 내 마음의 상황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그래서 미생의 오차장님 같은 캐릭터에 감동하는 게 아닐까 싶다. 장그래가 오차장님 만나서 회복되고 스스로 일어나게 된 것처럼, 나도 언젠가는 나의 이러한 결점들을 보완해 주고 지탱해 주는 좋은 이상화 대상을 만나서 공감 받고 인정받으며 회복되었으면 좋겠다.



3. 자기애성 엄마의 반성문(초록님)

나는 자기애성 엄마다. 직장 핑계 대고 육아를 부모님께 미룬 채 아이를 방치하다시피한데다 아이와 함께 하는 짧은 시간에도 다정하게 눈맞춤을 하거나 친밀하게 안아주거나 거울반응을 제대로 해준 적이 없다. 오롯이 내 고통과 내 불행만이 제일이어서 나를 향한 아이의 칭얼거림이 귀찮고 싫기만 했던 어리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엄마였다. 놀아달라고 안아달라고 울면서 다가오는 아이를 내치며 이불 속에 몸을 묻고 ‘엄마 피곤해. 할머니한테 가’하며 외면하기 일쑤였다. 상담 공부를 하면서 뒤늦게 나쁜 엄마였던 시절을 뼈아프게 후회하고 반성했지만 아이는 이미 결핍과 상처를 그득 안은 채 성인이 되어 버렸다. 딸에게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그땐 엄마가 어리고 나약해서 너를 보듬어 안아줄 힘이 없었다’고 자백하고 빌어 보지만, 이기적인 엄마가 만든 파장으로 인해 생겨난 갖가지 부정적인 감정들, 친밀한 관계형성의 어려움, 조직생활 부적응, 깊은 외로움, 사람에 대한 무관심과 전형적인 과대자기 증상들, 죽음에 대한 과도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딸을 보는 일은 괴롭다. 볼 때마다 죄책감에 가슴이 쓰리다.

12월 한달 간 코헛 강의를 짤막하게 들으면서 죄책감이 더 기승을 부렸다. 다시 한번 내가 자기애성 엄마임을 확인하면서 혀를 찼다. 강의를 듣고 돌아올 때마다 마음에서 천둥이 치고 벼락이 치는 걸 느꼈다. 한두 가지 부분에서가 아니라 모든 부분에서 자기애적인 사고를 저지르고 살았다는 것을 확인할 때마다 입맛이 썼다. 아이에게 중요한 대상인 아빠를 빼앗아버린 것은 어떤 자기합리화로도 용서가 안 된다. 애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혼했고, 날 때부터 아이에게 아빠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고, 아이가 자라면서는 틈만 나면 ‘니네 아빠는 병신 쪼다 같은 사람이야’라면서 아이와 아빠를 갈라놨다. 아이에게 아빠와 남자 전반에 대한 혐오감을 심어주는 것이, 딸이 아빠를 증오하게 만드는 것이 딸을 지키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나쁜 남편은 보나마나 나쁜 아빠일 거라고 과잉일반화해 아이에게서 아빠를 뺏어버렸으면서도 좋은 아빠 역할을 할 사람을 찾아주는 일에는 한없이 게을렀다. 그저 내 자기애를 충족시켜줄 대상을 찾아 헤매 다니느라 모든 에너지를 쏟았으므로 아이는 완전 뒷전이었다. 아이만 없으면 자유롭게 남자도 만나고 원하는 일도 할 수 있을 텐데 아이 때문에 원하는 걸 못해서 억울하고 분했고 내 인생을 꼬이게 만든 아이가 밉기만 했다. 아이가 사고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한적도 있었다. 바깥에선 선생이랍시고 수업시간마다 학생들에게 인생은 어쩌고 하는 조언들을 했고, 번듯한 지면에 <케빈에 대하여>에 나오는 모성 부족 엄마들 때문에 사이코패쓰가 많아진다며 비판하는 글도 기고했다. 무책임하고 공감능력 떨어지는 사이코패쓰는 케빈이나 케빈 엄마가 아니라 나 자신이라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얼굴 한번 제대로 보지 못한 아빠와 공허하고 이기적인 엄마 사이에서 철저히 방치된 아이는 극심한 과대자기와 멸절불안을 겪으면서 왕따를 겪고, 학교를 자퇴하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방에 틀어박혀 온종일 게임만 하면서 스스로를 유폐시켰다. ‘너 그러다가 폐인 된다’는 할머니 할아버지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리고 한 마리 벌레처럼 무기력하게 사춘기를 낭비하는 딸을 보면 답답했다. 딸 내면에 자리 잡은 거대한 격노와 불안, 공포, 외로움, 결핍, 상처들을 보듬고 공감해줄 힘이 1g도 없었던 나는 학교를 관두자마자 히키코모리 딸을 부모님께 버려둔 채 도망치듯 서울로 와버렸다. 방에 틀어박힌 딸을 지켜보는 게 힘들고 괴로워서였지만 딸 입장에서 보면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엄마에게 또 한 번 버림받은 셈이었다. 서울에 와서 인문학과 철학 공부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미술상담 공부를 시작하면서 비로소 내가 딸에게 했던 행위의 내막을 서서히 깨닫게 됐다. 나는 뼛속까지 나르시스트였고, ‘나는 옳고 세상은 그르다’는 생각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아이에겐 그토록 가혹하게 폭력에 다름 아닐 정도로 방치해놓고는 세상이 불합리하고 부조리해서 나와 같은 순수한 영혼을 핍박한다고 여겼고, 그러므로 나는 선한 피해자 혹은 더러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바쳐진 희생제물이라고 생각했다. 그 미숙함, 그 무책임함, 그 유치함, 그 오만함. 아무 것도 모른 채 세상에 내던져져 어리둥절해 있는 아이에게 엄마라는 사람이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며 살아왔던가. 떠올릴라치면 얼굴이 화끈거리는, 지울 수만 있다면 다 지워버리고픈 흑역사의 시절들.

내가 조금 정신이 돌아온 것은 서울에서 안정적이고 평온한 성격을 가진 남자를 만나 새로운 삶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남자는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과 다르게 양육을 잘 받고 커서 배려와 존중이 몸에 배인 데다 사려 깊고 진중하며 인내심 강하고 부드러운 평화주의자였다. 가정에 대한 책임감도 강하고 성실하며 내가 원하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지원해줬다. 덕분에 요동치던 정서가 빠르게 안정을 찾았고 둥둥 떠다니던 상태가 고요해지면서 그동안 하고 싶었던 공부, 못했던 창작 활동을 맘껏 할 수 있게 됐다. 비로소 딸을 돌아볼 여유가 생겨났다. 부모님 곁에서 유폐돼 있던 딸을 서울로 불러와 대안학교도 보내고 직업훈련도 시켰다. 미안하다고 사과도 했고 ‘너는 사랑받을만한 가치가 있는 소중한 존재’라는 말도 들려줬고, ‘네게 일어나는 안 좋은 일은 모두 엄마의 양육미숙 때문이며 네 잘못이 아니다’라고도 말해줬다. 아이에게 따뜻한 밥을 지어 주고 친밀하게 안아주고 웃는 얼굴로 사랑한다고도 말해주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무엇이든 지지해주고 격려도 해주었다. 틈만 나면 아이와 대화하면서 감정을 물어보고 진심을 다해 공감해줬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을 걸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아이가 차츰 자기 얘기를 하기 시작했고, 침묵으로 일관하던 데서 싫다 좋다는 표현을 할 수 있게 됐고, 아르바이트해서 제 용돈도 벌었다.

하지만 여전히 엄마의 스킨십을 진저리쳐 했고, 사랑한다는 말이나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손발이 오글거린다고 했으며, 타인과 정서적 교감을 나누는 일을 힘들어 했다. 어떤 일에 의욕이 생긴 듯하다가도 금방 시들해졌고, 한군데 맘을 붙이지 못하고 이 학원 저 학원을 전전했으며, 한 사람과 진득하게 사귀질 못했다. 친구관계도 협소하고 절친도 없었다. 시간이 줄긴 했으나 여전히 게임에 몰두하는 시간이 많았다. 20세가 넘어 아이가 독립을 원했다. 보증금만 쥐어준 채 월세와 생활비는 벌어서 해결하라고 원룸을 얻어줬다. 처음엔 힘들어하던 아이가 차츰 독립생활에 적응해갔고 알바와 직업훈련을 병행하던 끝에 정규직으로 취직이 됐다. 본인이 좋아하고 잘하는 IT직종이었다. 그때부터 딸은 조금씩 밝아졌고, 생기가 생겼고, 자신감도 자라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어찌나 고마운지 눈물이 났다. 볼 때마다 와락 껴안고 ‘엄마가 그토록 모질게 대하고 상처도 많이 줬는데 이렇게 잘 자라줘서 정말 고맙다, 우리 딸이 너무 자랑스럽다’고 얘기했다. 대견하고 감사한 마음이 저절로 올라왔다. 딸은 예상 외로 회사에 적응도 잘 하고 맡은 일도 잘해서 입사한지 1년이 되지 않아 승진을 했다. 딸은 이제 겉에서 볼 땐 아무 문제가 없고 그냥저냥한 회사원 가운데 한 사람처럼 보일만큼 평범하다.

하지만 가끔씩 내게 전화를 해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는 얘기를 털어놓거나 건물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는 악몽을 꾼다는 말을 한다. 친밀한 관계 유지가 어렵고 자의식 과잉을 버리기 힘들다는 하소연을 할 때도 있다. 감정을 드러내놓고 표현하는 것이 어렵고 때때로 과소비를 해서 곤혹을 치룬다고도, 고지서를 받고도 날짜에 맞춰 돈을 내지 못해 가스가 끊기거나 담배를 끊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죄책감이 고개를 든다. 4번의 코헛 강의를 들으면서 딸의 괴로움들이 엄마와 애착 결핍으로 인한 과대자기와 아빠의 부재로 인한 이상화 대상의 결핍이 혼합되어 나타나는 성격장애 증상이라는 것을 재확인한다. 그런 의미에서 코헛 강의는 내게 확인사살 같다. 엄마의 어떤 모습 때문에 딸이 그렇게 되었다는 식으로 인과관계를 연결시켜 준다. 엄마의 자기애 성향 때문에 딸이 관계에서 노력하지 않고 착취하려고만 하는 것이다, 엄마가 적절한 좌절과 실패의 기회를 주지 않고 딸의 충동과 욕구를 물질적인 것으로 즉각 만족시켜주었기 때문에 딸의 인내심이 약한 것이다, 딸이 엄마의 사랑을 원할 때 주지 않고 나 몰라라 하면서 지나치게 방치했기 때문에 딸이 한계 설정을 잘 못하고 남에게 도움을 요청하질 못하는 것이다, 딸이 불편한 부분들은 대부분 엄마의 자기애 성향이 딸에게 전염되어서 그런 것이다, 딸이 남자 혐오증에 빠진 것은 엄마가 아빠에 대해 나쁘게 말했기 때문이다....등등.

눈치 빠르고 똑똑한 딸에게 인과관계를 설명해주면 딸은 잘 알아 듣고 이해도 빠르다. 하지만 딸은 정말 이해한 것일까. 딸이 제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엄마에 대한 억압된 분노를 표출하고 애도하고 통합하는 과정을 겪지도 않았는데, 엄마가 먼저 나서서 잘못을 사죄하고 미안하다고 하는 건 오히려 아이에게 분노를 표출시킬 기회를 차단하고 발달을 지연시키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나는 심리상담 공부를 하면서 깨달은 지식과 이론으로 딸의 상처를 이해한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딸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도 내 마음 편해지자고 하는 액션이거나 죄책감을 덜기 위한 쇼가 아닐까. 나르시스트가 좋은 남자 하나 만났다고 갑작스레 성격구조가 수정되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여러 가지 질문들이 솟구치는 와중에 코헛 강의를 들으면서 다짐한 한 가지가 있다. 충분히 독립적으로 잘 살고 있는 딸에게 예전의 실수를 만회한답시고 아이가 필요하지도 않은 순간에 돈을 퍼준다거나 아이 혼자 충분히 해낼 수 있는 갈등이나 인간관계 애로사항들, 조금만 노력하면 해낼 수 있는 사소한 처세술 습득에 예전처럼 먼저 나서서 도움을 주지 않고 혼자 좌절하고 실패하면서 배워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아기 때 잘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커서 아이가 도움을 요청하기도 전에 결핍을 채워주려고 애쓰는 칠푼이 짓을 한 적이 꽤 있다. 무엇보다 주의해야할 것은 ‘유일하게 좋은 사람으로 엄마만 알게 하는 짓’을 끊어야 한다는 것. 엄마 말고도 세상에는 좋은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체득할 수 있도록 믿고 지켜보아야 하는 것이다. ‘거봐, 세상에 믿을 사람이라곤 엄마밖에 없지?’라고 일러주고픈 마음. 딸에게 최고로 칭송받는 엄마가 성공한 엄마라는 그 마음이 내겐 있었다. 코헛 강의를 통해 그 마음이 엄마&딸이라는 이자관계 속에 딸을 묶어두려는 나르시스트의 욕망이라는 걸 깨달았다. 죽비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는 것 같은 충격파였다. 딸로부터 ‘세상에 내 진짜 모습을 다 받아주고 이해해주는 사람은 엄마밖에 없어요’라는 말을 듣고 싶은 소망의 발원지는 친정엄마와 외할머니까지 올라가는 유구한 역사를 지녔다는 걸 이미 꿈분석을 통해 잘 알고 있다. 그 욕망의 고리를 내 代에서 끊고 싶다. 내가 발달하는만큼 딸도 발달할 것임을 믿기에 멈추지 않고 더더 분발하고 싶다.



4. 나를 찾아가는 여행(빨강님)

󰡒OO야! 엄마 몇 살로 보여? OO야! 그 아줌마하고 엄마하고 누가 더 젊어 보며? 더 이뻐 보여? 당신 나 늙었어? 나 살졌지?....󰡓 나는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남편에게... 아이들이 태어나서 대화가 되기 시작한 후에는 아이들에게 늘 나에 대해 물어 본다. 나보다 영리하고 똑똑한 아이들은 이제 그런 엄마의 질문에 듣는 척도 안한다. 아예 󰡒엄마 말해주면 얼마 줄 거야?󰡓 하고 대답할 정도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 모습이 우리 친정 엄마의 모습이었다. 내가 우리 아이들만 할 때부터 지금까지.. 늘 엄마 이쁘니? 이 옷이 어떠니? 주름이 생겼는 데... 누구는 눈 수술을 해서 주름이 없어 보인다는 등 ..내가 지겹게 듣고 대답해 주던 그 모습이다.

언젠가 김은옥 선생님이 엄마의 정체를 알아야 나를 정확히 알 수 있다는 말씀이 생각난다. 나의 실체를 몰라, 내 안에 든든함이 없어, 정확히 내가 누구인지 몰라.. 우리 친정 엄마가 하던 짓을 나는 나 자신에게 우리 아이들에게 한다. 내가 밖에서 인정을 못 받거나, 마음이 우울하거나 하면 나는 더욱 아이들에게 대답을 들어 내가 누구인지 알고자 한다. 그나마 다행히 남편은 착하고 좋은 사람이라.. 나를 이해해 주어 지겨워도 진심으로 대답해 준다. 늘 그런 남편이 고맙다. 하지만 언제까지 다른 사람의 눈과 입으로 담아주는 것에 나를 만들어야 하는 지... 너무 슬프다. 나는 늘 곁으론 단단하고 자존심 강한 아이로 어른으로 비취어 졌다. 늘 내 스타일이 있고 내 방식이 있었다. 어느 장소를 가도 내 자리를 만들어 꼭 그 자리에 앉아야 하고 음식점을 가도 내가 정한 집, 머리를 해도 한 집으로 정하면 줄곧 변화 없이 그 자리에 간다. 그런 내 모습이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상은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그 핵심이 없다. 그래서 인정의 욕구가 너무 강하고 어느 곳을 가서 내외적으로 들어나지 않으면 마음은 힘들고 우울해진다. 그런데 더 슬픈 것은 그 주변의 사람들에 관한 인정이나 관계는 실상 다 내 중심에 있다. 그냥 주변 사람들은 나를 비춰지는 사람이다.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 솔직히 나는 사람이나 친구의 관계보다 물건을 더 좋아한다. 관계보다 소유가 더 좋다. 이쁜 물건이 나를 더욱 기쁘게 하고 흐뭇하게 한다. 늘 어려서부터 그랬다. 그 이유를 모르고 40년을 넘게 살았다. 인정받지 못하면 지옥으로 내려가서 죽고 싶고... 조금 인정받으면 다시 UP되어 올라가서 세상이 다 내 것이고.. 내가 필요하지 않을 때 친구들은 귀찮고 나에게 조금이라도 피곤하게 굴면 그 즉시 만남을 종결하고 ....오히려 이쁜 물건이 더 좋아하는.. 그런 직면하기 싫은 모습이 내 모습니다. 어쩌다 이런 자기애만 가득한 사람이 되었을 까? 우리 엄마는 딸 하나인 나를 귀하게 키웠다고 생각했는 데...그게 엄마가 나를 위해서가 아닌 자신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얼마나 씁쓸하고 슬프던지... 한번도 누구와 깊게 마음을 접촉한 적이 없는 나... 진정한 관계를 모르는 나... 다시 힘내서 알았으니... 더 늦기 전에 도전해 볼까? 너무나 부족한 내가 할 수 있을 까? 내 남편과 엄마하고 해결하지 못한 진정한 관계를 가져볼까?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잘은 모르지만..그래도 이 만큼이나 나를 이해하고 알고 가는 이 겨울이 감사하다.



5. 과대자기 발달과 이상화축 발달 그리고 자기 대상에 대한 자기 분석(분홍님)

나는 오래전부터 어느 집단에 들어가더라도 그 집단 참석의 본 목적 외에 사람들을 눈여겨보며 그 중에 배울만한 점이 있거나 뭔가 매력적인 사람을 찾고 있는 나를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절대 먼저 말을 걸거나 접근하는 용기는 내지 못하고 그냥 혼자서만 몰래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뿐이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나의 안중에 둘만한 상대가 아닐지라도 누군가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 눈치를 채면 그 사람에게도 관심이 갔다.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 별 볼일 없어보일지라도 나를 좋아하는 게 확실해보이면 마음이 약해져서 무시할 수가 없고 나도 모르게 자꾸 의식되었다. 내 자존감을 채워주는 대상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어떻든 그런 사람들은 먼 과거부터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가끔씩 기억이 나며 나에게 모종의 힘을 주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이렇게, 나도 그들에게 은연중 관심을 가졌으며 잊지않고 기억해내곤 한다는 사실을 추호도 눈치채지 못하리라!

이러한 나의 내숭은 이성간의 교제에서 결국 만족스런 관계를 누릴 기회를 갖지 못하게 하였다. 내가 매력을 느끼는 사람에겐 절대로 먼저 프로포즈를 하지 못하고, 늘 나를 연모하는 사람과만 교제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그는 항상 내 이상에 못미쳤고 마치 하향지원한 기분이랄까 신나지 않은 기분으로 연애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나의 애인은 나의 존재가 감지덕지하여 나를 떠받들 듯이 대해 주었고, 나는 그나마 그런 우쭐한 맛에 그 관계를 유지할 만 했지 않았나싶다. 이런 초라한 나르시시스트!

즉 내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만한 힘은 가지지 못해 늘 수동적으로 관계를 맺게 된 주제에, 결과적으로 맺어진 관계에 있어서는 공주처럼 대접받는 입장이 된 것이다. 아무래도 이건 나의 무의식이 과대자기를 좌절시키고 싶지 않아서 만들어낸 책략이라는 혐의가 든다. 수업을 듣다보니... 내가 부러워하는, 나보다 뭔가 더 그럴듯한 것을 가진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 틀림없이 나의 과대자기는 깨어질테니까...나의 과대자기를 수정해 업그레이드할 힘은 부족하고...인정하자니 참으로 비겁한 것 같고 참담한 기분이 들지만, 그럴 듯하다, 그럴 것이 다.

나는 부모님 양가 집안에서 처음 태어난 아이여서 사랑을 한몸에 듬뿍 받으며 초년을 지냈고 내가 1년 4개월째에 남동생이 태어났는데 그 동생이 태어나자 바로 아버지는 군대에 들어가셔서 3년을 복무하고 돌아오셨다. 그러니 딱 오이디푸스시기에 아버지는 부재중이셨고, 21살 엄마는 시어머니 모시고 가장역할하느라 밖으로 일하러 나가야했다. 엄마는 아직 어린 나이에 남편 사랑도 충분히 못받고 스트레스도 많아 당시 삶의 힘겨움은 어디에 풀 길 없어 장녀인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이 되었을 것이다. 발달과정상 중요한 시기에 엄마는 나에게 좋은 자기 대상의 역할을 충분히 해줄 수 없었다. 엄마의 일관성없고 미성숙한 양육과 아버지의 현실적 부재로 나에게는 정상적인 이상화축이 실패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상적인 애착 인물의 존재를 강렬히 기다리면서도 실제로는 그것을 위한 어떠한 적극적인 액션을 취할 수 있는 힘이 없었던 것이다. 힘뿐만이 아니라 모델링이 안되었기 때문에 방법 자체를 모르고 있다고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다만 상대가 알아서 해주기를 바랄 뿐... 그러니 언제나 나의 이상형은 그림의 떡이었을 뿐 나에겐 차선의 선택만이 나의 몫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와중에 나의 자기애와 과대자기는 표면상 좌절되지않고 유지되어 온 것 같았겠지만, 무의식은 항상 그런 자신에게 불만족하고 분노를 억압해왔을 것이다. 분노의 대상은 나 자신만이 아니라 자기 대상인 엄마와 또 전이된 남편이기도 해서 나는 여태껏 꼬장부리고 엄살부리고 어리광부리며 어른으로서 자신이 주인되어서 살아오지 못했던 가보다. 맘같지 않게 이상하게도 늘 늦장부리고 미루는 등 성공에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생활태도를 취해왔던 것이 아마도 이상화축의 실패에 원인이 있었던 것 같다.

이제야 도대체 이해할 수 없었던 나의 문제적 생활패턴의 원인을 깨닫게 된 것인가...그럼 이제 새해부턴 내 고질적인 질병인, 늦잠과 지각과 게으름에서 벗어나길 기대해봐도 될까... 그리고 맘에 드는 상대에겐 내 마음을 표현해볼 수 있을까나?



6. 엄마(흰색님)

위로를 받고 싶었다. 내안에 갇혀 살면서 표현 못하던 내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래서 많은 것을 놓치게해서 미안했다는 얘기를, 엄마가 몰랐던 현실은 힘들었어도 진심은 사랑이었다는 말을, 마음을 열고 이야기하고 단 한번이라도 듣고 싶었다. 그리고 용서하고 싶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만난 친정엄마는 언제나 그랬듯 오늘도 엄마 자신의 삶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 그리고 자식에 대한 이유없는 걱정의 감정만 토할뿐이다. 점점 소원해지는 자식에 대한 서운함 그리고 시어머니에게 잘 할수 없었던 며느리로서의 엄마를...여전히 너 자신보다는 엄마인 나를 알아달라는 외침...

그것은 자식과의 본딩을 유지하고 반영받고 싶은 엄마의 과대자기적 욕구라는 것을 알지만 나는 또 다시 표현하지 못한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온몸의 기운이 빠지고 머리는 멍해지고 마음은 무거운 닻에 걸린듯 압도 당하는 느낌이 든다.
누군가 나의 입을 틀어막기라도 하듯 말을 꺼낼수가 없었던것은 나 또한 어린시절 자기대상 결핍에서 온 무기력이다.
나는 이미 엄마에게는 존재만 있고 자리는 없었던 엄마의 엄마, 엄마의 아빠가 있었음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들어줘야만 하는 엄마가 서운하고 자식을 삼켜버린 크로노스처럼 무섭다. 그래서 난 두려움을 피하기위해 늘 반영만 해주는 에코와 같은 삶을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나도 위로받고 싶은데...엄마는 오랜만에 만난 딸에게 그저 안부를 묻고 다정히만 대해 줄수있는 여유조차 없는 것일까...그렇게 나는 속으로만 외치고 있었다. 귀로는 엄마의 불만을 들으며 마음은 방패가 되어 그 외침을 막아내고만 있었다. 순간 이젠 더이상 엄마에게 삼켜져버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나의 마음을 의식화하며 엄마에게 말했다. 자식을 그냥 용서하고 믿어주라고 아빠를 미워하지 말라고 시어머니에게 못해준것은 물질이 아니라 마음의 여유였다고 그러니 이제 모두 용서하라고 걱정안해도 나는 잘 살아가고 있다고...지금 생각해보니 그것은 나 자신을 향한 말인것같다. 엄마의 격정이 수그러들었다. 엄마를 다운 시키기위해 했던 말이, 나를 반영해준적 없는 엄마가 나의 이상화 대상마저 삼켜버리게 한것이 이상화축에서 받을수 있는 인내와 여유의 결핍이었다.

두살도 안된 어린 아기가 십대 가정부의 손에 안겨있는 사진이 있다. 그 아기가 나다. 세상 모든것을 소유한 과대자기도 그 안에서 죽었다.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내 마음을 알아달라며 남편에게 반영받기만을 바라며 분열로 남편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내 감정이 가는대로 남편을 대했다. 다른 사람에게 수없이 하는 수고와 감사의 말 한마디가 가장 가까운 남편에게는 얼마나 아끼는 말인지... 이제 생각해보니 이런 나의 모습은 자식에게 너 자신보다는 엄마를 알아달라는 나의 엄마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어디 남편뿐일까 남편과 자식을 향한 끝없는 자기대상 요구는 남편에게는 에코이며 내 아이로 하여금 이상화 대상마저 앗아가는 괴물인 것이다.



7. 나는 왜?(남색님)

1년 반쯤 TV 프로그램인 ‘꽃보다 할배’를 방영할 당시 나는 나이가 70이상인 배우들이 자신의 삶속에서 경험한 이야기들을 할 때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귀에 쏙쏙 들어오면서 나를 반성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다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나는 왜 내 아버지 연배의 다른 사람 말에는 감동하고 그 말들이 멋지게 들리는데 아직도 우리아버지가 하는 말을 들으면 다 잔소리 같고 감동이 안 들까?”하는 생각이 들면서 “이건 뭐지?”하고 생각을 하다가 흐지부지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런데 요즘 성당에 교리 공부를 하러 다니면서 내 아버지 연배의 분께 수업을 듣는데 그 분이 하시는 인간의 보편적 진리 외에 그 분의 개인적 여담에도 나는 감동을 받을 때가 많았다. 이 때 다시 드는 의문. “나는 인간적으로 나름 열심히 살아온 내 아버지가 하시는 말에는 왜 발끈하면서 계속 말대꾸할거리를 찾거나 아니면 나를 계속 변명하면서 대체로 아버지의 이야기가 수용이 잘 안될까?”. 이 두 개의 에피소드가 주는 의문에서, 나는 이번 과제로 나의 자기대상이었던 아버지와 내 이상화 축의 결함에 대해 생각해보기로 했다.

Good과 Bad로 분열된 내 아버지
아버지에 대해 기억을 해보면, 내 의식적 기억 속에서는 14세 이전까지의 Good인 아버지와 14세 이후의 Bad인 아버지, 20세 이후의 내가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살았던 내 아버지가 있다. 어릴 적 good인 내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육아일기를 썼고,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돌림자 이름 대신 유명한 작명소에 가서 큰 돈을 주고 이름을 지어오셨다는 일화에서 감동을 받았고, 나는 엄마 말고 늘 아버지의 따뜻한 가슴에 묻혀 아버지의 귀를 만지고 잤고, 토끼나 참새 사냥을 같이 갔고, 미꾸라지나 가재를 잡고 놀아주시거나, 개천에서 투망을 던져 물고기를 잡거나 함께 낚시를 하면서 찌보는 법, 미끼 다는 법 등을 알려주시고, 겨울에는 연을 만들거나 혹은 썰매를 만들어서 늘 즐거이 놀거리를 제공해주셨다. 그리고 자기애자인 아버지가 보시기에 내가 총명해보였는 지 나는 초교 3학년때부터 아버지를 독대하여 조선일보에 나오는 사설이나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어려운 어휘의 뜻을 배웠고, 아버지 손을 잡고 서점을 갔으며 한자와 영어도 아버지께 배웠다. 그 뿐 아니라 아버지는 망우리 공동 묘지에 산책을 나가서 삶과 죽음, 묘비의 적힌 글의 의미 외에 소파 방정환, 한용운, 조봉암 등 위인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다. 그리고 혼내실 때는 아무리 화가나셔도 소리를 지르시거나 욕 한 번 하시는 법 없이 몇 대 맞을지 생각을 하고 마당에 나가서 자기 매를 스스로 꺾어오게 하셨다.

그런데 내가 14세가 되면서부터 그 이후의 내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대부분 나쁜 기억 밖에 없다. 내가 중학교에 가서 다른 학교에서 온 다양한 아이들과 노는 걸 좋아하고 공부에 관심이 없어지자 말은 괜찮다고 하시지만 실망의 눈빛, 그리고 언제나 내 공부에 지나친 기대를 하시는 게 난 싫었다. 사실 중학생 이후로 나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 돈과 또래가 갖는 가방, 옷, 로맨스 소설책 이런게 필요했는데 경계선자인 엄마는 충동조절이 안되어 내가 아버지랑 엄마랑 싸울 때마다 늘 엄마 편을 들어주면 내가 원하는 것들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내 맘대로 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엄마랑 한 편이 되었고, 이후로 끊임없이 내 물질적 욕구를 채워주지 않고 내게 리미트를 주는 아버지의 맘을 아는 대신, 우리집의 경제적 능력을 언급하면서 혹은 아버지를 ‘좀스럽다’고 말하면서, 때론 아버지를 자식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못하는 무능력한 가장으로 취급했다. 그러면서 늘 아버지가 엄마를 힘들게 한다고 하소연하는 엄마편을 일방적으로 들어서 언제나 집에서 외톨이처럼 지내야했던 아버지가 점점 술에 의존하는 날이 많을수록 나는 알콜중독의 못난 사람 취급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랑 엄마랑 싸우다가 아버지가 던진 엄마 로션병 유리가 깨져서 엄마 발 뒤꿈치에 유리가 박힌 적이 있는데 그 때의 생생한 피와 유리 파편에서 나는 내가 알던 고상한 아버지가 아닌 어떤 미친 사람을 발견한 충격을 받았고, 나중에는 그냥 말씀을 못하시고 술을 드시고 자식을 무릎꿇게 해서라도 본인의 할 이야기를 하시는 아버지를 술주정에 잔소리꾼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내가 나이가 들면서 현실을 알수록 자기애자인 아버지의 현실과 다른 이상적인 태도며 모범을 보이지 않고 늘 말로만 온갖 좋은 소리를 다 말씀하시는 아버지가 이중적이며 본받을 가치가 없는 아버지란 생각에 나는 적지 않게 실망했다.

엄마 & 나 : 아버지 & 나
엄마는 외할아버지의 부재가 컸던 사람으로 아버지가 엄마보다 나이가 6세가 많기에 든든함과 따뜻함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결혼을 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보니 12명 대가족의 맏며느리로써 엄마는 경험하지 않은 것들이 많아서 역량이 늘 부족했고 그런 엄마에게 아버지는 따뜻함으로 감싸주기보다는 엄마를 무식하다고 못배워서 그런거라고 늘 비난하고 무시했으며 그 대신 엄마랑 할 모든 관계를 큰 딸인 내게 하면서 늘 엄마와 다르게 키우려고 노력하셨다. 외롭고 힘든 엄마는 층층시하 어려움 속에서 속상하면 언제나 내게 화를 내고 나를 때렸다. 그러면 나는 고모, 삼촌, 증조할머니, 아버지까지 나를 예뻐해주는 사람이 많았기에 누군가에게 알리기 위해서 악을 쓰면서 언제나 많이 울었다. 그러면 왜 어린애를 울리냐고 엄마는 아버지한테 혼나고 나는 나를 달래기 위해서 누군가 손에 쥐어준 사탕이나 과자를 먹으며 혼나는 엄마를 ‘쌤통이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어릴 때 엄마가 나를 때리면서 시기심에 많이 했던 말은 “우리집은 니가 문제야, 너만 없음 내가 니 아버지랑도 싸우지 않을텐데 니가 문제야, 너 때문에 하루도 집이 조용할 날이 없어, 니가 없었어야 되는데 어디서 너 같은 게 태어나서”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엄마는 내가 어릴적부터 나를 혼내거나 때리고 나면 반동의 방어를 주로 사용했기 때문에 엄마의 죄책감을 이용해서 나는 엄마에게서 많은 것을 갖을 수 있었다. 또한 내가 엄마에게 혼나고 컸음에도 불구하고 엄마가 나를 방치하지 않고 관계를 맺으면서 살 수 있었던 것은 엄마가 외할머니와 본딩된 채 자란 경계선자인 동시에 자기애도 높은 사람이라 꿈많은 엄마가 가난한 집의 맏딸로 포기하고 산 것이 많아서 엄마는 나를 엄마 자신과는 다른 삶을 살게 해주기 위해서 엄마의 가치관 안에서 많은 노력을 하셨기 때문이다. 조금은 우습지만 ‘손에 물 묻히고 자란 딸은 평생 그렇게 산다’고 생각한 엄마는 몸이 아무리 힘들어도 내게 어떠한 집안일도 시키지 않았으며 내가 26세에 엄마가 병원에 입원을 하신 때가 있었는데 그 때도 내게 집안 일을 시키는 대신 새벽에 병원을 빠져나와서 밥과 반찬을 만들어 놓고 다시 병원으로 들어가신 분이시다. 때문에 나는 어떠한 면에서 부부 관계가 튼튼하지 못한 엄마, 아버지 두 사람의 편애를 받으며 서로 자기 대상으로 동일시하면서 기형적으로 키워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자기애자로서 내가 얻고 싶은 물질과 책임 면제 등을 얻고 싶을 때는 엄마 편을, 엄마가 미울 때 그래서 따뜻한 아버지의 정서가 그립고 힘들 때면 아버지편을 들어 아버지가 주는 따뜻함과 말들에서 힘을 얻으면서 교묘히 부모님을 나 편한대로 착취했다가 버렸다가를 반복하면서 살았다.

엄마의 아버지 자리
외할아버지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 외할머니는 친엄마를 어릴 적 잃고 새엄마 손에서 자란 무남독녀 외동딸로 충청도에서 강원도까지 멀리 시집을 오셨는데 외할아버지가 외할머니와의 정이 없어서 집에는 월급날만 들어오셨다고 한다. 그렇기에 외할머니는 맏딸인 엄마와 본딩되어 늘 외할아버지의 원망을 늘어놓으며 엄마에게 아버지의 자리를 만들어주지 않으셨고 엄마도 어쩌다 들어오신 할아버지가 이모들만 예뻐하셨기에 엄마 역시 기억나는 추억도 없으며 외할머니를 고생만 시킨 나쁜 사람으로 기억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자란 엄마가 시집을 와서 내가 7세까지는 아버지를 존중해주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내가 7세 때까지 증조할머니까지 다 살아계신 집에서 살아야했기에 엄마는 시어른이나 시누이 셋이 무서워서라도 아버지께 억지로라도 잘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분가 후 엄마가 점차 자기 목소리를 내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씩 나를 잡아놓고 아버지가 사실은 어떤 사람인지 아느냐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내가 몰라도 되는 이야기까지 울면서 늘어놓았다. 어린 나는 내가 아는 아버지가 그런 아버지가 아니라 여겨서 아버지에게 다시 가서 엄마가 한 얘기를 고스라니 하면서 부부 사이를 더 나빠지게 했던 일도 더러있었는데 중학교에 가면서부터는 내가 살아야겠기에 무의식적으로 나는 엄마와 본딩되어 살았다. 어쩌다가 아버지가 어떤 말씀을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시면 나는 늘 싫은 표정으로 앉아 엄마께 ‘제발 멈춰달라’는 싸인을 보냈고, 그러면 어느 새 내 무의식의 동지인 엄마는 늘 “술을 마셨으면 곱게 마실것이지 내일 애들 학교도 가야하니까 이제 그만 해요, 저 못나서 못사는 사람이 뭘 애들한테는 그리 구구절절 옳은 말만하는 지”하고는 아버지의 말씀이 다 끝나지도 않았는데 우리를 일으켜 방으로 돌려보내셨다. 그렇게 점점 자라면서 내게 아버지의 자리는 점차 없어져갔다.


점차로 통합되는 내 아버지
분열되었던 내 아버지 상이 두 번의 수업을 통해 점차 수정이 되고 있으며 내가 원하지 않았어도 아버지로써 관계를 끊임없이 하시려고 애쓰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났다. 나는 내 아버지가 내가 점차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술의 힘을 빌리시기는 하셨지만 언제라도 내게 하실 말씀이 있으실 때는 지금까지도 나를 무릎꿇게 하셔서 말씀을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떠올린다. 아버지가 약 25년 동안 지금까지도 내게 하시는 똑같은 말씀은 세 가지다. 하나는 “사람은 혼자는 못산다. 세상도 네게 맞춰주지 못한다. 네가 남에게 맞추고 살아야할 부분이 많은데 넌 그게 안된다. 사람은 공존, 공생, 공공하고 살아야된다” 두 번째는 “역지사지가 뭔지 아니?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데 니 입장이 다가 아니야” 세 번째는 “여자라도 삼국지는 읽어봐라. 세상사는 지혜가 뭔지 아니? 난 네가 유비를 닮았으면 좋겠다. 모자른 듯 하나 겸손하고 주변에 사람이 많은 유비를 보면 인덕이 아주 제일 큰 덕이다”. 과제를 하면서 다시 아버지의 말씀을 잘 이해해보니 자기애자인 내게 아주 딱 맞는 말씀을 해주신것이었는데 그래서 지금은 감사하다는 생각이 드는 이 말들이 왜 이전에는 그냥 잔소리로 들렸는지 알게되니까 너무 슬프고 속절없이 지나간 세월이 너무 안타깝다.

다음으로 까맣게 잊고 지냈다가 내가 결혼하기 전에 아버지는 나와 남편에게 레포트를 내 주신 것도 기억이 났다. “결혼이 무엇인지?, 왜 결혼이 하고 싶은 지?, 결혼을 해서 상대방에게 얻고 싶은 건 무엇이고 나는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이런 레포트를 쓰고 나는 결혼을 했다. 이번 코헛 과제를 하면서 보니 내 아버지가 참 ‘멋진 아버지’셨는데 나는 왜 그 동안 내 아버지를 ‘아버지’ 대신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가장’ 혹은 ‘못난 남편’으로 여기면서 자식인 나와는 관계가 먼 ‘남편’이라는 부분에 포커싱을 하고 엄마처럼 아버지를 괴롭히고 살았을까? 이제 내가 자식과 아버지로써 좋은 관계를 맺기에 내 아버지의 연세가 71세라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진다.

이번 과제는 평소 내가 권위자나 어른의 말씀에 순종적이지 않으며 그들의 말과는 상관없이 나는 언제라도 잘 살 수 있다는 이상한 과대자기가 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2번의 수업을 듣던 중, 어느 날부터 나도 모르게 그 분들의 말을 믿으며 그 의미가 진실로 다가오기 시작했는데 유독 내 아버지에 대해서만은 여전히 아닐까? 하는 의문에서 시작된 생각을 나와 부모님의 관계를 통해 나름 정리한 것이다. 이번 과제를 통해서 나는 전체적인 가족사 속에서 우리 부모님에 대해, 그리고 나와 부모님의 관계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었으며 내가 자라면서 어떤 면에 있어서는 피해자인게 맞지만 나 또한 내 병리적 자기애를 유지하기 위해서 내 부모를 이용하고 버리면서 엄마, 아버지 사이를 왔다갔다 하면서 내 부모를 힘들게 한 점이 많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 점이 지금 많이 죄송하고 속상하다. 내가 갖고 있는 이미 구조로 형성된 내 자기애적 성격을 내가 다 고칠 수는 없지만 나를 잘 아시는 내 아버지가 내게 하신 말들에 큰 가치로 두고 내가 실천하고 살기 위해서는 성찰이든 상담이든 수업이든 수정을 위한 내 노력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번 과제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이번 과제로 얻은 것이 하나 더 있는데, 미움도 원망도 분노도 그 이면에는 “사랑받고 싶다고, 내 마음을 공감해달라고, 버리지 말라고”의 뜻이 있다는 것, 그리고 삶에서 받은 내 상처가 상처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내 삶의 살아가는 힘으로도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8.자기대상 (주황님)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해변의 수도승”이란 그림을 보았다. 하늘, 바다, 땅과 옆으로 서 있는 수도승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존재 하지 않는 너무나 외로운 그림이었다. 이 그림을 보면서 내가 생각났다. 어릴 때부터 항상 혼자서 산에 올라 그냥 울었던... 창밖의 노을을 보며 한숨 쉬던.. 왜 울고 한숨을 쉬었는지.. 아무리 울고 한숨을 쉬어도 결코 해결되지 않는 먹먹함과 답답함 이 세상에는 나를 알아주고 원하는 사람이 없다라는 외로움. 누군가의 위로와 공감이 나에겐 너무나 절실했다.

아빠는 언제나 농담을 해도 잘 받아주는(나는 대들거나 토를 달지 못했다) 나에게 넌 다리 밑에서 주워왔다는 말을 자주 하셨다. 그 말이 얼마나 깊은 상처가 되는지 아빠는 모르셨겠지만 그 때 내가 울거나 거짓말하지 말라고 했다면 더 이상 이런 농담은 안하셨을까? 힘없는 나는 네~ 하고 그냥 웃어버렸다. 엄마는 항상 바빴다. 그리고 엄마에 대한 기억은... 내 결혼식장에 와서 “여기에 온 사람들 중에 엄마가 제일 예쁘지?”라고 묻는, 첫 아이 출산 전에 비싼 아기 이불을 사 놓고 선물이라면서 너무 비싸니까 니가 돈을 반 내라는... 아이 출산 후 병원 간호사들이 너무 잘해주었다. 그것은 나에게 친정엄마가 없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내 감정과 물질을 착취 당해도 화를 내거나 억울한 감정을 표현하지 못했다. 이렇게라도 나와 관계하는 엄마가 필요했기 때문이었을까?

누구와 관계를 해도 어느 순간 외로움을 느끼고 버림당하는 상상을 하며 미리 이별을 준비하고 나를 착취하는 대상임을 알면서도 관계유지를 위해 착취를 당해주었다. 나는 항상 바닥에 존재했다. 나와 관계하는 사람들을 칭송하며 나는 그들보다 잘난 것이 없는 못난 사람이라고 강조했다. 유머코드도 나를 비하하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면서 말이다. 이렇게 해야만 계속 함께 해 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통이 아닌 그들의 잘난 모습을 반영해주는 거울일 뿐이었다. 그리고 내가 지쳐 관계가 소원해질 때 쯤 그들은 나쁜사람이 되어 내가 미워하는 대상이 되었다.

대학생 때 친구를 따라 교회에 갔었다. 거기서 나를 전도하기 위해 정말 열심히 설명하던 분이 있었다. 그런데 나를 전도하려는 것을 알게 되자 그 분의 말만 듣고 있을 뿐 어떤 마음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았다. 참 건방지게도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라는 마음이었던 것 같다. 왜 그때 그분의 노력을 무시했는지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나보다 공부도 못하고 이쁘지도 않은 친구의 작은 교회라서 나보다 잘나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거 같다. 나보다 잘났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굽신거리면서 약한 사람에게는 못되게구는 내가 싫어하는 이중적인 사람의 모습이 나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나를 붙들어주길 간절히 원하면서도 겉으로는 놓으라고 소리치는 내 마음을 들킬까봐 두려워하지만 다시 나를 붙들어 주지 않으면 큰 실망감에 사로잡혀 버림 받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교회에서 집으로 돌아와 ‘조금만 더 전도해 보지’라는 섭섭한 마음을 갖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홀로 존재하지 않았다. 누군가를 억지로라도 붙들어 놔야만 했고 내가 만든 이상한 관계 속에서 나는 남을 배려하는 꽤 괜찮은 사람이다 라고 생각해 왔다. 그리고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나의 보호자가 되어 나를 지켜주길 바랬다. 부모에게 받아야 할 것들을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 원하는 나의 존재를 부담스러워 하거나 불편해 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말이다.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에코가 싫었다. 나와 너무 닮은 모습이 싫었기 때문이다. 나도 스스로 생각하고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싶으나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문제를 해결 할 힘이 아직은 부족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잘 기억은 안나지만 수업을 들은 이후 예전보다 한숨을 많이 안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침을 삼킬 때 마다 목에 뭐가 걸린 듯 불편하던 것도 이제는 느껴지지 않는다. 무엇이 나를 불안에서 나오게 했는지 아직 잘 성찰은 안 된다. 하지만 남편과의 관계회복, 부모자식간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잘 못 느끼는 나에게 아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예뻐보인다는 점, 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알아가는 있고 그래서 나를 조절 할 수 있는 힘이 생겼다는것 등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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