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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엄마의 몽상
김은옥(rroye@hanmail.net) http://www.freudphil.com
2014년 08월 24일 22:12 1590
"선생님. 삶이 재미가 없고 지루해요. 무엇이든 뻔하고 시시해요. 어떤 것이든 의미가 없어 허망한 마음이 들고 슬퍼요. 저는 남이 부러워하는 연예인이 왜 자살을 하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요. 저도 때론 사는 게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워서 평화를 맛보고 싶거든요. 헌데 어떤 티비 프로에서 귀신은 자신이 죽었는지 살아있는지 모르면서 존재하는 영이라는데 정말 그 말이 끔찍하게 느껴졌어요. 지금 내 상태도 그러한데 죽어서도 똑같다면 전 어떻게 해야 하나요?"

내담자의 이런 먹먹한 마음에 답변 대신 나는 마음속으로 무망씨가 원하는 삶에 대한 기대를 상상해본다. 이분을 이리 힘들게 만든게 무엇일까 보다 그녀가 진정 무엇을 바라고 좋아할까...


아기에게 있어서 최초 대상은 엄마다. 그런데 갓 출생한 아기는 엄마 품에 안겨지기 전에 먼저 자신을 둘러싼 '무한한 세계'와 접촉한다. 현대정신분석가 비온은 아기의 첫 경험을 한계지울 수 없는 실재(물자체)인 'O'와의 만남으로 칭한다. 그때 아기가 매개자 없이 O를 직접 경험하면 아기의 정신이 감당하지 못해 충격을 받게 된다. 그래서 아기와 날것의 실재인 O 사이에서 매개와 완충 역할을 해주며, 아기의 충격을 담아주고 정서적 지지를 해주는 존재인 엄마가 반드시 필요하다.

엄마라는 대상이 있어야 아기는 편안한 상태로 존재하고 낯선 세상(O)을 감당할 수 있다. 그래야 아기는 자신이 경험한 실재(O)의 내용을 조금씩 처리해내어 정서와 인지 기능을 발달시킬 수 있다.

만약 엄마가 불연듯 없어지면, 아기는 낯선 자극들 쏘아대는 세상(O)에 대해 두려움에 빠져, 편안히 관계할 대상 일반이 사라진 것으로 지각한다. "엄마가 없어졌구나, 으아! 나도 곧 죽게 될거야~" 그러다 사라졌던 엄마가 다시 돌아오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아기에겐 차츰 대상없음을 견디는 능력이 생긴다. 이것이 훗날 '대상(구원자)'의 항상된 실존에 대한 믿음인 F(faith)의 토대가 된다. F는 엄마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된, 불멸의 신성과 우주에 대한 믿음을 의미한다.

정신증자란 O(실재, 세상)에게서 버려져 접촉이 끊어진 일종의 고아이다. 그/녀는 인생의 최초 순간부터 O에 의해서 담겨지지 못한 아기이다. 생명의 원천인 O에게서 버림받음은 곧 엄마에게서 버림받았음을 뜻한다.

비온에 의하면, O에 대해 적절한 관계 리듬을 형성한 유아는 왠만한 상처를 받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병리는 자신이 O와 엄마와 연관해 받은 충격들에 대해, 온전히 느끼고 사고하지 못한 데에 기인한다. 정신증자는 탄생 초기의 O의 충격을 소화해내지 못해(엄마가 그 충격을 담아주지 못해), 현실에 대해 온전히 느끼고 생각하는 능력을 형성시키지 못한 자다.


무망씨는 늘 삶에 대해 극단적으로 예측하며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가까운 대상들이 자신을 미워하거나 싫어할 것이며, 사랑하는 대상이 자신에게 무심하고 상처주고 있으며, 좋아하는 대상은 언제나 나쁘게 헤어지고, 좋은 배우자나 똑똑해서 공부 잘하고 말잘 듣는 자녀는 부러운 이웃의 일일 뿐이다.

한번 나쁜 사람은 어떤 좋은 가능성도 없으며, 자신은 하는 일마다 재수가 없고, 잘하는 것이 하나 없어서 배우고 싶어도, 하고 싶은 게 별로 없다. 더구나 부담스럽고 짜증나는 이 모든 불행이 평생 지속될 거라는 믿음이 깊어 고통이 끊이지 않는다.

긍정적이고 행복해하는 사람과 접촉하면 보통의 경우 그 좋은 감정이 흡수되어 기분이 좋아지는데, 무망씨랑 함께 하는 사람은 그 무망감이 고스란히 전염될 것이다. 무망씨에게 "오늘 옷이 참 예뻐요"라고 말하니, "왜요?"라고 응답해서 무안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상담자가 무망씨에게 "오늘 기분이 매우 나빠 보여요. 어떤게 불만이고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나요" 라는 질문을 하면, 상담시간 전부가 불행에 관한 응답을 받게 될 것이다.

엄마의 몽상은 아기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 "이게 뭘까?" 분류하는 능력이다. 엄마가 "아~ 졸려서 그렇구나. 속상하구나. 기분이 좋구나" 말을 하면, 그 말 자체를 알아듣는다는 것보다 엄마의 정신 안에 담겨있는 아기의 불편감을 소화시켜주는 (알파) 요소들이 아이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엄마의 몽상이 지닌 그런 기능을 경험해야 유아에게 고통자극을 견디고 소화해내는 자아기능(알파기능)이 활성화되어, 생각하는 능력이 발달된다. 아기를 바라보며 넘치는 자부심과 사랑 감정을 느끼며 아기에게 화답하는 엄마를 상상해보자. 아기의 마음을 생각할 수 있는 엄마의 능력이 곧 세상의 낯선 자극들을 소화해내는 정신활동(알파기능)이다.

나는 무망씨의 불행한 일상 보고를 듣고 해석하는 대신 오늘도 이러저러한 현실적 이야기로 상담을 시작한다. "선생님 지난 주 쥴라이라는 프렌치 레스토랑에 갔었는데요. 기대한데로 맛있어서 친구들과 한 번 더 갔죠. 헌데 메뉴가 같아서인지 맛도 그냥 그렇고 별로 친절하지 않더라구요" (종업원이 무망씨를 기억해내지 못했다) 이와 비슷하게 첫 번째 상담에서 느꼈던 기대감에 그녀는 상담회기를 주 3회로 늘렸었다. 상담자는 무망씨에게 다양한 메뉴를 선택해서 경험할 수 있는 레스토랑과 쿠킹 클래스를 알려주었다. 그녀는 나의 정보에 만족해하면서 안심했다. "그 레스토랑의 경험처럼 상담과 상담자에 대해 실망했을 때 무망씨가 도망갈 수도 있으니, 상처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꼭 표현해달라"는 상담가의 말이 그녀에게 도움이 되었을까.

내담자의 일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이야기는 상담과 상담자와 관련이 있다. 무망씨는 계속 열거하는 현실적 에피소드와 꿈에 드러나는 자신의 깊은 상처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충격 받은 고통자극에 대해 기억하고 생각해내는 기능이 아직 활성화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담자 또한 그녀가 겪은 상처에 대한 깊은 해석은 마음에만 담아 둔다. 환상에 의지해 살고 있는데 그것의 실체가 드러나면 얼마나 힘들겠는가.

무망씨는 정곡을 찌를 때 자존심 상해하고 수치스러워하는 매우 취약한 분이시다. 그는 작고 큰 좌절을 담아낼 수가 없어 늘 박해감을 느낀다(거절과 경멸). 그래서 누군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조금이라도 건네면 열배로 누군가에게 쏟아 내야하고 보복해야한다. 얼마 전 친 언니가 라섹 수술을 해서 자유로워졌는데 부럽지만 자신은 수술을 하면 의사의 실수로 망막박리가 일어나 실명하게 될 것이니 수술을 절대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한다.

정신에는 사고작용의 신진대사를 거치지 못해 정서적 내용으로 자각되지 못한 요소들이 있다. 비온은 이를 베타요소라 칭했다. 베타요소가 과대 축적되면 고통이 처리되지 못한 채 남아 있는 원시적 정서 덩어리들이 정신에 꽉 차서 공포와 불안을 일으킨다. 그것에는 인생의 최초 순간들에 겪은 충격(재앙) 분위기가 담겨 있어, 현실에서 작은 부정적 자극이라도 받게 되면, 극도로 민감해져서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의존도 못한 채 철수한다. '다 필요없어. 믿을 수 없어. 소용없어' 죽이고 싶고 죽고 싶은 원망과 무망감들이 그녀의 정신을 꽉 메운다.

그녀에겐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자극에 대해 "현실상황에 맞게 생각해내는 능력'이 실패한 것이다. 무망씨의 꿈은 늘 전쟁터이거나 재난상황이다. 좌절을 견뎌내는 능력이 있어야 베타요소가 알파요소로 바뀌는데, 그 능력이 없기 때문에, 꿈에서 폭발하거나 싸우거나 죽이는 상황은 해결해야할 정서적 고통들을 소화해냄 없이 단숨에 없애버리는(비워내는) 징표이다. 그녀에겐 낯설고 충젹적인 세상(O)으로부터 자신을 구원해줄, 견뎌낼 힘을 주는 믿음의 대상(엄마)과 믿음(F)이 살아남지 못한다. 현실에서 어떠한 욕망도 추구할 수 없게 되고 타자들과 신뢰로운 관계를 지속적으로 맺을 수 없게 된다.

비온은 유아가 엄마로부터 담겨지는(containing) 경험을 못할 때 파괴성을 갖게 된다고 보았다. 그 파괴성은 애정어린 매개자에 의해 담겨져야, 비로소 통제되고 현실의 목표를 향해 사용될 수 있다.

담아주기는 존재를 (신체와 정신을 함께) 수용해주는 것이다. 엄마의 기능은, 생각할 수 없는 아기의 생각이전의 생각, 원 정서, 최초의 경험(경험으로 소화되지 않은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치료자 역시 겉으론 수동적으로 보이나 내면으로 활발한 사고와 몽상 활동으로, 내담자가 소화하지 못한 상처(베타요소)들을 떠올려 대신 소화해내어 내담자가 감당할 수 있는 요소로 전환시켜 되돌려 준다. 이런 상담 관계 율동이 현실의 자극들에 대해 둔감했던 내담자의 사고 능력을 활성화 시킨다.

무망씨는 상담시간에 성서에 자신을 투사해서 무의식을 바라보곤 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예수님의 부활 사화들, 나인성 과부의 아들, 달란트의 비유, 향유를 부은 여인, 부자와 나자로, 돌아온 탕자의 비유등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를 해나갔다. 성서 이야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생각해 낼 수 있는 역량을 촉진시켜주는 것만으로 상담자는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이 되었다. 말이 잘 통하지 않았던 엄마와 아버지를 대신해서 감정적 침범없이 알려지지 않은 모든 것에 개방과 기적을 담을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

분석의 중요성은 건강한 대상관계를 촉진시키는 역할에 있을 뿐만 아니라 더 중요하게는 자아가 스스로 고통을 겪는 것을 통해서 진실에 접촉하고 좀 더 진실된 삶을 살수있게 해준다. 자아가 현실의 고통을 감당해낼 수 없어서 도망간 것이 병의 근원이다. 고통을 겪을 수 있는 것이 건강함의 징표이고, 진실에 다가가는 것이다.

사실 내담자는 열심히 상담자에게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자신의 무의식에게 말하는 것과 같다. 상담자는 다리 역할을 하는 것 뿐이다.
우리의 내적 자기가 우리 자신이 되도록 허용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자신을 진정으로 담아주고 이해하는 타자 관계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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