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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나 아닌 나
관리자(cjlee7600@hanmail.net) http://www.freudphil.com
2017년 08월 10일 12:02 126
나는 과연 내 인생의 주인인가?
진정 확신할 수 있는가?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한마디 외칠 수 있는 나만의 ‘나 다움’이 있는가?

은퇴한 어느 동창이 우울한 모습으로 자기 딸이 걱정스럽다며 도움을 청한다.
딸이 직장을 들어간 얼마 후부터... 자신을 대하는 느낌이 이전의 딸 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토로한다.
“정감어린 아이였고, 정답게 잘 지내왔는데, 어느 순간 벽이 느껴지고 정신이 영 달라졌어 !
.........................................................................................................................”

정신분석가는 사람을 만날 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상식 요소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즉, 내담자가 이미 알고 있는 의식의 사실들에 주목하지 않으며, 그가 어떤 말을 하고 있지만 그 뜻이 뭔가 모호하고 색다른 느낌을 주는 요소들에 주목한다.
'정신분석의 눈'으로 사람을 몇 번 접하면, 그가 어떤 이유로 지금과 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심연의 얼개가 대강 드러낸다.

열심히 살고 있다 말하는 개성씨는 만나자마자 자신의 부모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우리 부모는 늘 자신의 관점에서 저에 대해 간섭을 하고 요구를 해대세요.
그래 늘 답답해요. 같이 얘기하고 있으면 에너지가 고갈되고요. 시간이 낭비되는 느낌이 들어요.
저는 저대로 살고 싶어요. 부모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제가 원하는 데로요.. ”

부모에 대한 불만이 세상 불만으로 이어진다.

“우리나라는 참 많이 불공평한 것 같아요.
힘들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구요. 사회적 ‘차별’이 도처에서 느껴지구요.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보상이 충분치 않은 것 같애요.”

그녀의 표현이 활기 있고 개성 넘쳐 보인다.
표현 내용도 꽤 자연스럽고 견실하다.
그런데 뭔가가 힘들어 보인다. 뭐가 문제인가?

개성씨 말들은 얼핏 보면 총명하고 주관이 뚜렷해 보인다. 그러나 정신분석의 눈으로 경청해보면, 그녀 말은 상당부분 자신의 것이 아니다.

그녀가 표현한 생각 대부분은 언니, 엄마, 친구의 말로 구성되어 있다. 아울러,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했던 엄마의 애정을 대부분 영리한 언니에게 가로챔 당해 우울해하고 분노하는 ‘아이의 말’이다.

그녀에겐 ‘나’가 없다.
그녀에게 개성이 있는가? 그것은 차근히 음미해야 하는 주제다.

흥미를 끌거나 압력으로 주어진 이런저런 외부자극들에 즉각 반응하는 ‘원초적 나’가 그녀에게 있다. 그런데 주어지는 여러 자극들의 긍정적 부정적 의미들을 애써 대면하고 대결하고 극복해내서 정신적 무게를 형성해낸 ‘소신 있는 나’가 보이지 않는다. 그녀의 사고 작용은 깊은 내면을 향해 나아가지 못한 채, 대부분 의식의 표면에서 이리저리 미끄러진다.

겉으로는 사람들의 기분을 활활 돋구는 (조적) 재능을 지니지만, 그 속을 보면 ‘자주 침체되는 기분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자극 주는 말들을 속에서 뱉어낸 것일 뿐, 자기 말의 의미와 결과에 대해 ’종합적으로 사유‘하거나 ’책임지려는 나‘가 없다. 그녀 입에서 뱉어진 말들은, ’자신이 오래 곱씹어 소화해낸 자기 말‘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빌려온 말들이기 때문에, 그 말에 대해 ’왜‘ 책임을 저야 하는 것인지...좀처럼 이해하지 못한다. “왜요? 왜 그래야 하는 건데요 ~”

그렇다면 개성씨의 정신을 채워주고 좌우하는 주인은 누구인가? 과거에는 전능한 힘을 발휘하던 엄마였다. 그런데 현재는 엄마가 아니라,(엄마는 이미 그녀 안에 내면화되어, 그녀가 이미 엄마 자체다) 남자친구, 직장의 대표, 그리고 엄마 대신 자신을 빈틈없이 관리하는 언니 똑똑씨다.

(엄마처럼) 종합적 사고력이 부족한 개성씨는, 공부 잘해 출세한 언니에 대해 열등감을 가진 동시에, 언니를 자랑스러워한다. 개성씨는 자신에게 부족한 것을 수시로 언니에게서 흡입(introject)해서, 자신의 것으로 사용한다. 언니의 안정감을 자신의 것으로 취하는(모방적 동일시) 과정에서, 열등감이 해소되는 느낌을 갖는다. “자랑스런 언니와 더불어 나는 가치로운 존재야~”

그런데 그녀의 열등감이 진정으로 해소된 것인가? 언니를 ‘내사’하여(삼켜서) 얻은 심리적 안정감이 과연 ‘자신의 것’이며, 지속적 안정을 줄 수 있는가? ["내 몫의 애정을 흠뻑 가로채간 이 나쁜 년아~"]

개성이 톡톡 튀는 듯 보이는 그녀는, 실상 많은 시간 무기력하고 우울하다. 주관적 상상계 속에서 살고 있기에, 상징계의 직장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총체적으로 이해되지 않아 업무에서 늘 문제가 생겨 문책 받는다. 세상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부분 지각, 부분적 이해’만 할뿐, 좀처럼 현실감 있게 종합적으로 지각하지 못한다.

그녀는 기분이 어둡게 가라앉을 때마다, 인터넷이나 주변에서 뭔가 에너지 있어 보이는 것을 끊임없이 수집해 흡수하려 든다. 그런데 그녀가 흡수하는 외부 정보들은 대부분이 일시적 흥미를 끄는 단순 지각 자료들에 불과하다. 정신으로 애쓰며 소화해내야 하는 무거운 전문자료들은, 자동으로 걸러지거나 가볍게 각색된다.

그녀가 원하는 자기방식의 삶이란, 자신에게 심리적 부담을 주지 않는 흥미 유발 자극들에 마음껏 자유롭게 접속하여, 그것들을 즐기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녀의 이런 (反사회적인) 마음과 태도는, 아이 때부터 아이의 생활을 과도하게 통제해온 엄마의 양육방식에 대한 반발에서 유래한다. 아울러 언니보다 공부 못하고 정신이 산만하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평가절하당한 과거 상처와 열등감에서 유래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엄마가 (직장 일에 쫒겨 가정에 집중하지 못하던)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자리’를 넘겨주지 않은 채, 자신이 그것을 소유하며 자식의 삶을 전적으로 통제해왔다는 데 있다.
이런 가족 구조에서 양육된 자식의 경우, ‘나의 정체성’은 자신에게 있지 못하고, 그녀 삶을 좌우해온 힘 있는 ‘그 분’에게 종속된다.

사춘기 시절 자기 자신을 회복하려고 애쓰며 절대권력자로 지각된 엄마에게 한동안 격하게 반항 했지만, 엄마의 (병리적) 기운이 워낙 강해서 그 투쟁 몸짓의 결실이 애매하고 어둡다.( 반항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이 벗어나고 싶어 한 그 대상과 뿌리 깊게 닮게 된다.) 개성씨는 어떤 때는 본연의 개성을 드러내다가, 다른 때는 자신이 내면화한 타자의 삶을 모방 재현하면서 ‘본연의 나 & 나 아닌 나’ 상태를 교대로 반복한다. 진짜 나와 가짜 나, 화통한 나와 꽉막힌 나, 감정이 살아있는 나와 남의 말을 흡수해 그대로 따라하는 나, 분노하는 나와 순응하는 나...사이를 오락가락한다. 서로 대비되는 두 인격을 하나로 연결하여 (혼란스런 상태를 한동안 버텨내며) ‘통합’해하지 못한 채, 양쪽을 오락가락하는 삶을 계속 반복한다.

“(통합된 나, '통합하는 나'가 없어) 이 사람 말을 들으면 그 말에 영향 받고, 저 사람 말을 들으면 또 그 말에 영향 받고. 이 사람의 요구 저 사람의 요구를 거절 못한 채 받아들이다가 내가 하고픈 것에 쓸 시간이 없어져 몹시 피곤해요.”

“나를 이용해 먹고 힘들게 만드는 이기적인 사람들(‘무의식의 언니’...)과 차별이 심한 이 나라(‘무의식의 엄마’)를 떠나고 싶어요 ~”
“하하, 이 세상엔 같이 놀고 싶은 사람들도 많고 하고픈 일도 참 다양해 보여요. 지금 이 순간을 최대한 기분 좋게 살고 싶어요”

끊임없이 뭔가를 표현하는데, 자기가 뱉은 말들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그녀가 온전히 자각하고 있는 느낌이 거의 안 든다.

상담가가 긍정적인 말을 전해줄 땐 얼굴이 밝아지고, 심각한 문제를 대면시켜줄 땐 놀라는 표정을 짓는데, 그렇다고 그것에 집중해 뭔가를 애써 소화해내려 노력하는 느낌이 없다.
마치 끊임없이 새롭게 출현 교체되는 인터넷 기사들처럼, 정신의 어딘가에서 보관되어 있던 이러저런 정보들이 뇌 회로와 입을 통해 흘러나오고, 그것들 중 어딘가에 잠시 관심과 감정의 무게가 머물긴 하지만, 이내 새로운 이야기 대상들을 행해 관심이 흘러가는 집시 느낌이 든다.

한 주제에 진득이 오래 머물지 못하는 그녀에게 타인의 말에 쉽게 휩쓸리지 않는 ‘무게 있는 나’를 지니게 해주려면, 운명적인 누군가가 '오랜기간 지극한 정성’을 들여야 한다. 무엇보다 그녀가 온전히 받지 못한, 자신을 존귀한 존재로 응시하는 헌신적 양육자의 눈, 그 누구와도 비교될 수 없는 소중한 사랑 대상으로 대하는 따스한 애정 결핍이 채워져야 한다. 아울러 어떤 이유들로 그녀가 고통스러움을 겪게 되었고, 자존감의 상처를 받게 되었는지 ‘아이가 지각한 눈’이 아닌 ‘성인이된 지금의 눈’으로 세심히 공감 받고 이해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엄마가 집요하게 독점해온 ‘아버지의 자리’를 엄마 아닌 제3의 권위자(大他者)에게 연결하여 회복시켜 주어야 한다.

[자존감이 약한 그녀는 자신의 약점이 혹여 주변 대상에게 발각되어 수치스런 상황에 놓일까봐 늘 두려워하며, 겉으론 미소 짓고 속으론 외롭게 지내 왔다. 그래 수치스런 상황에 처하지 않기 위해 어려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여러 방어기제 중 하나로 힘있어 보이는 대상의 말과 생각과 모습을 재빨리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사용하는 정신기제를 형성한 것이다. 그것이 그녀의 정신구조로 굳어져 그것으로 자신을 그럴듯하게 보호(포장, 자기망각, 자기도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로인한 뜻밖의 곤혹스런 부작용들, - 비현실감, 원인모를 분노, 부정적 대상 표상(‘자신을 비난하고 평가절하하는 엄마’), 약한 자존감(원인모르게 ‘하찮게 느껴지는 나’), ‘무게 있는 나’ 부재, 무기력과 우울..-에 주기적으로 시달려오게 된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처음 입문하는 과정에서, 처음 겪는 직장의 냉정한 현실요구들에 직면하여, 내면에서 미해결된 문제들이 재활성화되고, 그것을 방어해내는데 자아에너지가 과도지출되어 고갈되면, 정신의 균형이 깨지며 총체적 위기상태에 처하게 된다. 그 순간 생존을 위한 비상(병리적이고 과도한) 방어가 자동작동되어, 자신을 불안과 위기에서 구해줄 것 같은 타인(중요한 대상)의 정신성에 전적으로 의존, 함입(종속)되어 '나 아닌 나'로 변질되는 일종의 증상인격이 생겨난다. (이 상태는 자아동조적이기 때문에, 당사자는 자신이 문제있는 상태에 처해 있음을 좀처럼 지각하지 못한다.) 그 상태에서, 은퇴후 모처럼 딸에게 관심을 쏟는 아버지의 마음에 지각된 딸은, 더 이상 정겹고 귀여웠던 과거의 딸이 아닌 제3자로 느껴진다. “어, 딸이 뭔가 너무 이상해. ~”

어떤 문제를 지닌 성격구조 내지 증상이 생겨나는 본질원인은 최근의 어떤 요소에 기인하지 않는다. 최근의 힘든 상황은 하나의 촉발원인에 불과하고, 근본원인(들)은 사춘기와 유년기에 그 뿌리가 있다. [개성씨의 삶이 꼬이는 심층 원인은, 그녀 인격의 상당부분이 자기자신이 아닌 내사된 인물의 것이라는 데 있다. 그녀는 자신이 삼켜서 동화된 '엄마 자신', '언니 자신' '이다. 개성씨의 직장생활이 꼬이고 힘들어지는 것의 상당부분은 그녀 속 엄마가 직장생활에 힘들어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문제를 지닌 성격 내지 증상의 원인을 뿌리부터 이해하고 치유하려면, 그 개인이 거처 온 전체 삶의 과정을 세밀히 탐색하고 전체적으로 조망하여, 주요 결핍들을 보충하고 기존의 반복되는 (병리적) 정신구조를 재구조화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정신분석 과정'을 통과해 내기엔 현재 그녀의 조건이 여러 가지 부적합해 보인다.
상담비를 스스로 낼 능력이 부족해 분리 독립해야할 엄마나 언니에게 의지해야 하는 상황에선, 분석 예후가 좋기 어렵다. 또한 기존 대상들이 비록 그녀를 염려하긴 하지만, 그녀가 변화되어 자신의 통제영역을 벗어나는 것을 진정으로 원할지 의문이다. 그 경우 분석과정을 손상시키는 집요한 방해들이 주변에서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게 된다.
또한 자아가 강하지 못한 현 상태에서, 거북한 감정과 상처가 쌓인 무의식을 하나씩 대면해가는 힘든 정신분석 과정을 얼마나 버텨낼 수 있을지 확신감이 들지 않는다. [아직 정신이 변화될 '운명의 때'가 오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분석가의 지인 가족에 대해서는 심층(무의식) 분석을 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 규약이다.

예비상담 마지막 시간에, 개성씨가 그동안 왜 힘든 상태에 반복해서 처하게 된 것인지 무의식의 원인 몇 가지를 ‘가볍게’ 전해준다.
[짧은 만남에서 보통사람은 ‘무의식’을 전해줘도 이해하거나 수용할 능력이 없다. ‘가볍게’ 전해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 수용한다. 정신분석 칼럼에 나온 이야기와 해석들 대부분은 현실에서 한번도 표현된 적 없는 ‘어떤 무의식’에 관한 (의식에 드러난 몇 가지 단서에 근거한) 정신분석가의 몽상과 직관일 뿐이다.]

젊은이에게 뭔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한마디 덧붙인다.

“절망감이 밀려들 때, 신뢰감 드는 분석가를 발견해, 당 차 고 거 대 한 ‘ 본 래 나 ’ 를 꼭 만나기 바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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